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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청동기 시대

선사시대 한민족 韓民族

by 느낌 . 2015. 8. 2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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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조형 안테나식 동검 유물로는 "북한 평양"에서 출토된 동검자루(銅劍柄頭)와 "대구광역시 비산동" 와룡산 기슭의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이 있다)
(청동기 도구 제작에 사용되었던 거푸집 유물, 기원전 1000년기에는 청동기시대의 기술수준에 도달하였다)
("경상남도 김해시 패총 조개 무덤 유적지)
(대전광역시에서 발굴된 유물)
(울산광역시의 반구대 암각화 탁본)
(인천광역시의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
("전라북도 고창군"의 고인돌 유적지)
북한 "나선시 나진 구역 해양동 초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물


한반도에 청동기 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학술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청동기 시대에 관하여 그 간의 경위를 살펴볼 때 한국의 청동기 시대 연구도 나름대로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는 특징적인 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에 민무늬토기 시대라고 명명한다. 개화기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 학자들이 한국의 고고학을 연구하였을 때, 한국에는 물론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고 보았으며, 그뿐만 아니라 금속문화라는 것 자체도 한국에서는 독자적인 발전이 없이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라고 일관하여 생각하였던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에 의한 고고학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에도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각처에서 청동기 유물이 나타남으로써 물적 증거가 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한국의 청동기 유물은 북한(北韓) 지역에만 있다는 설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出土)되고 있어 모두 시정되었다. 현재 청동기 유물의 분포를 보면, 함경도에서부터 전라남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다. 원래 청동기 시대는 석기 시대를 거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석기와 공존하는 금석 병용기(金石倂用器) 시대를 거친 뒤에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뚜렷한 금석병용기의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청동기 유물은 석기와 함께 나오거나 순수하게 청동 유물만 나오기도 하며, 철기와 함께 출토(出土)되기도 한다. 이는 보편적인 현상임에도 일제강점기의 연구는 철기가 나오는 김해 패총(金海貝塚, 조개더미)을 금석 병용기라고 정의하였다. 현재 청동기 시대의 상한(上限) 문제는 학계에서 정론(定論)이 없는데, 기원전 7세기, 기원전 10세기 등 대체로 두 설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청동기 유물이 중국적인 영향권이 아님을 볼 때, 다시 검토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돌널무덤은 그 분포가 남(南)시베리아·만주·한국 등지까지 넓게 퍼져 있는데, 시베리아의 돌널무덤은 기원전 8세기로 정해지고 있어 이 연대가 한국의 청동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볼 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돌널무덤에서도 청동기 유물이 나오기 때문에 향후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반드시 기원전 8세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대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청동기로는 세형 동검(細形銅劍)·겹꼭지 잔줄 거울(다뉴세문경, 多鈕細紋鏡)·청동촉(靑銅鏃)·구리창(동모(銅鉾)) 등이 있다. 특히 세형 동검은 만주, 한국, 일본의 규슈(九州), 러시아의 연해주에까지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지난날 한국에서 나오는 간석기 돌검은 동검의 모방품이라고 보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잃고 있다. 그외 경문청동기를 비롯하여 제사나 주술 등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가지방울이나 잔무늬 거울 등이 출토되고 있다.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는 주로 민무늬 토기이다. 이 민무늬 토기는 무늬 토기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구릉지대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때때로 청동기와도 함께 오고 있다. 또 대전 괴정동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검은간토기가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특히 민무늬 토기는 무늬 토기(특히 빗살무늬 토기)와 달리 밑이 편편한 것이 특징인데, 반달 돌칼이 나오는 경우 그것은 예외 없이 민무늬 토기 유적이며, 무늬 토기와는 관계가 없다. 반달 돌칼은 중국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특징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농경이 있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전파된 경로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청동기가 출토되고 있는 묘제, 곧 무덤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널무덤·고인돌(Dolmen, 지석묘)·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 움무덤(토광묘) 등이다. 청동기 시대의 경제활동은 어로(漁撈)나 수렵 및 채집과 같은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 최소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반달 돌칼의 존재는 농경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거대한 고인돌을 조영(造營)할 수 있는 힘도 실은 양곡의 충족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동기라는 이기(利器)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벌써 신분제의 초기적 성립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유자재의 양식 생산이 가능한 사회에서 청동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 청동기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곧 고대 국가를 세울 수 있는 힘과 조직의 근원이 된 것이다.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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