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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新羅 역사 평가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17. 4. 26.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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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는 우리나라 역사상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왕조 중의 하나이다. 신라의 건국 신화는 진한(辰韓) 땅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서 덕(德)이 있는 자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수도(首都)를 정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내려다보니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번개 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하늘에서 땅으로 비추고 있었고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붉은 알 한 개가 있었고 "말"(馬)이 사람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 후 "알"을 깨고 어린 남자아이를 얻었다고 한다. 이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 또는 불거내왕(弗矩內王)이라 이름 짓고, 위호(位號)를 거슬한(居瑟邯, 居西干)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6부의 여섯 촌락으로 모여살던 6촌장이 이끄는 사람들은 한반도 북쪽에 있던 고조선(故朝鮮)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고조선"이 중국 세력인 한나라(漢)와의 전쟁에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자 지금의 한반도 남부의 신라 지역에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왕위 계승 및 업적을 차례대로 말하고자 한다. 제1대왕 박혁거세(朴赫居世, 기원전 57년~기원후 3년)는 신라 왕국의 시조(始祖)로서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고 21년에 수도를 금성(金城)이라고 하고 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제22대 지증왕(智證王, 437년~?) 시절, 503년 나라이름을 "신라"로 바꾸었고 왕의 이름에서 '왕'(王) 글자를 붙여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사부"(異斯夫) 장군을 보내어 울릉도 우산국(鬱陵島于山國)을 정복하였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540년) 시절 종교인 "불교"(佛敎)가 들어왔고 건원(建元)이라는 연호(年號)를 썼으며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온 세상에 퍼뜨려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금관가야(金官伽倻國)를 병합(倂合) 하였다.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34년~576년) 시절,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며 신라 최대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진흥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신라 사회는 한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당시 사비(지금의 부여)에 도읍을 두고 있던 백제 성왕(聖王)과 군사 동맹(軍事同盟)을 맺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고구려 영토를 빼앗았다. 한강 유역에 이르러서 "신라"는 한반도의 동쪽 지방을 "백제"는 서쪽 지방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한강 유역에 이르러서는 신라 "진흥왕"이 군사 동맹을 파기(破棄)하였다. 그리고 "백제"가 다시 영토로 삼은 지금의 서울 한강 하류 서울 지역 일대를 무력으로 빼앗았다. 그리하여 중국으로 향하는 서쪽 바닷길을 얻어서 중원과의 교역 활로를 차지할 수 있었다. 불교 행사인 "팔관회"를 처음 열었으며 "황룡사"라는 이름의 절을 지어 불교 진흥에 힘썼다. 다음에는 "대가야"를 병합(倂合)하고 화랑 제도를 창시하였다. "화랑도"(花郞道)는 유불선(儒佛仙)과 삼덕(三德), 오계(五戒)를 도리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유불선(儒佛仙)은 사전에서 말하기를 유교(儒敎)와 불교(佛敎), 선교(仙敎)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유교(儒敎)는 쉽게 말해서 중국에서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 받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등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불교(佛敎)는 부처님(釋迦牟尼)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이며 선교(仙敎)는 신선이 되기 위한 도(道)를 닦는 종교를 말이다. 나머지는 정리해서 말하자면 세속오계(世俗五戒)라고 부른다. "세속오계"는 계율(戒律)로 신라 진평왕 시절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정한 것으로 불교적 성향도 가지고 있다. 다섯가지로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
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신라 무사 집단인 "화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삼국통일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金庾信, 595년~673년)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표적인 인물은 "관창"(官昌, 645년~660년)이다. 제23대는 진평왕(眞平王, ?~632년)이 올랐다.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시절, 김춘추(金春秋)에게 중국 당나라의 원군을 청하게 하여 백제(百濟)를 침공하였고 640년에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였다.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654년) 시절에 연호를 태화(太和)로 정하고 서기 648년에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 원조를 받았으며 금관가야(金官伽倻) 왕족이자 신라 화랑 출신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중하게 썼다. 불교 건축물인 "황룡사"(皇龍寺)를 완성하였다. 제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602년~661년) 시절에 당나라와 나당동맹군(羅唐同盟軍)을 결성하여 백제(百濟)를 멸망(滅亡)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하여 백제 왕실과 고구려 왕실을 무너뜨려 멸망시켰지만 왜(일본)의 백제유민 세력을 끌어들인 백제부흥세력과의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다. 고구려 유민들도 다시 나라를 세우려는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물리치고 신라가 이겼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681년) 시절, "나당동맹군"(羅唐同盟軍)으로 고구려(高句麗)를 멸망(滅亡)시키고 중국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 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은 당나라 영토가 되었다. 당악(唐樂), 신력(新曆) 따위의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에 노력하였고 죽은 후 죽어서도 "왜"(지금의 일본)의 침입을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東海)의 대왕암(大王巖)에 수장(水葬)되었다. 제45대 신무왕(神武王, ?~839년) 시절, 신무왕은 장군 장보고(張保皐), 김양(金陽) 등의 도움으로 839년에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王)이 되었다. 장군 "장보고"(張保皐)는 당나라(지금의 중국)에 건너가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어 활약하였고 신라로 돌아온 후, 지금의 남해안 완도(莞島) 지역에 청해진(淸海鎭)의 대사(大使)로 임명(任命)되어 황해(黃海, 西海)와 남해(南海)의 해상권(海上權)을 장악(掌握)하고 당나라와 "왜"(지금의 일본')를 오고 가며 동아시아 국제 무역을 좌지우지 하였다.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897)은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었다. 재위 시절,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로 국토(國土)는 다시 나누어졌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 ?~927년) 시절에 경애왕은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이끄는 왕건(王建) 세력과 후백제(後百濟) 세력을 이끄는 견훤(甄萱)의 침입을 받았으며 즉위 4년(927년)에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경애왕"은 자살하였다. 신라시대의 마지막 왕의 자리에 올랐던 제56대 경순왕(敬順王, ?~979년)은 경애왕이 죽은 뒤 935년 후고구려(後高句麗) 세력을 이끄는 신라는 왕건(王建)에게 항복(降伏)하며 신라(新羅)는 멸망(滅亡)하였다. 대체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비교하더라도 그 어느 나라보다 불교문화(佛敎文化)가 를 성대하게 꽃 피웠고 당나라(지금의 중국)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 "절"인 신라원(新羅院)을 설치하여 교류하였다. "왜"(倭, 지금의 일본)를 비롯한 서역(西域)과도 외교적 문화적으로 교류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교역 또한 활발하였다.조선시대와는 대조적으로 외외로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정치 관료 제도(政治官僚制度)였던 골품제(骨品制)가 존재하였는데 제일 윗 등급인 성골(聖骨) 등급 만이 왕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성골은 대체로 왕족들이 속해 있었다. 그 밑으로 귀족(貴族)들이 진골(眞骨)이었다.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는 진골 출신이었지만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이후에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 성골 출신 왕족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에 귀족들의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추대(推戴)를 받아서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진골 출신의 왕위(王位)의 자리에 올랐다. 국내에서 전국 각지에서 호족들과 농민들이 떼를 지어 신라 조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서로 장군(將軍)이라고 이름을 내세우며 무장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최종적으로 가장 큰 세력인 후삼국시대가 성립되었고 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갈라졌다. 서기 935년 신라는 고려의 왕건에 항복을 고려에 신라 영토가 대부분 복속되어 병합하였다. 그리고 고려 통일 왕조가 탄생했다.

*NAVER 백과사전 국어사전 참고함, 그 밖에 자료 참고함,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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