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조선 朝鮮 역사 평가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17. 4. 27. 06:55

본문

"조선"(朝鮮)은 고종 황제 시절 건국(建國)한 "대한제국"(大韓帝國) 이전의 시대(時代) 시기로서 사실상 우리나라의 마지막 왕조(王朝)이다. 사전 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고 정리해서 글을 남기고자 한다. "고려"의 제32대 우왕(禑王, 1365년~1389년) 시절 요동 정벌을 떠났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개경으로 돌아온 후,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했다. "고려"의 제33대 창왕(昌王, 1380년~1389년)은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른 후 바로 "이성계"가 "창왕"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 제34대 공양왕(恭讓王, 1345년~1394년)은 이성계 세력에 의해서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의 충신(忠臣)이었던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죽임을 당한 후, "공양왕"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고려"(高麗)는 멸망(滅亡)하였다. 처음에 당시 군인(軍人) 신분이었던 "이성계"(李成桂)는 북쪽 경계에서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당시의 "고려"의 참신한 지식층에 속하였던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이름의 인물과 그를 따르는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 "이성계"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고려 왕조" 멸망시키고 1392년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 당시 명나라(明, 지금의 중국)가 우리나라 맨 처음 국가인 "고조선"을 빗대어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점을 비추어 보았을때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 관계(君臣關係)였고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만연하게 이루어졌다는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사회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서 중앙 집권적인 양반 관료 체제를 이루어 낸 왕조이다. 태조(太祖)는 이성계(李成桂)이다. 그는 조선을 세우기 이전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꿈 내용이 집이 무너졌는데 "집"의 지붕을 지탱하고 있던 서까레 3개를 한 몸에 나란히 들고 일어셨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이 꿈해몽을 스님인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부탁했고 스님은 꿈 속의 사람 모습이 마치 왕(王)의 형상과 비슷하여 장차 나라를 세워서 "왕"이 될 운명(運命)이라고 말하여 주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군인 출신인 "이성계"는 조선의 제1대 왕(王)인 태조(太祖)가 되었다. "이성계"의 자식인 "이방원"(李芳遠)은 자신을 둘러싼 많은 수의 가족 형제들을 제치고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방원"은 우선 제2대 왕으로 형제인 "정종"(定宗, 1357년~1419년)을 왕위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방원"이 제3대 왕위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의 태종(太宗, 1367년~1422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고 여러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제4대 세종(世宗, 1397년~1450년) 시절, 조선은 전기 문화의 황금기(黃金期)이자 전성기(全盛期)를 이루었다.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을 창제(創製)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 음악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켰으며 집현전(集賢殿)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였고,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천"(李蕆), "장영실"(蔣英實), "신숙주"(申叔舟), "맹사성"(孟思誠), "정인지"(鄭麟趾), "황희"(黃喜), "권제"(權踶), "박연"(朴堧) 등이 있다. "김종서"(金宗瑞) 등을 시켜서 영토의 6진(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 섬(對馬, 대마도)을 정벌(征伐)하여 왜구(倭寇, 일본 해적)를 제압(制壓)하였다. 제6대 단종(端宗, 1441년~1457녕) 시절, "단종"은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왕위를 빼앗겼고 죽임을 당했다. 제7대 "세조"(世祖)가 바로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이다. 세조는 국방, 외교, 토지 제도 및 관제의 개혁과 개편 등에 업적(業績)을 남겼다. 그리고 "경국대전" 등의 책을 편찬(編纂)하였다. 제9대 "성종"(成宗, 1457년~1494년) 시절에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폈고 사림파(士林派) 인재(人材)를 중하게 썼다.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거의 완성하였으며,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시켜서 백성들에게 퍼뜨렸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은 폭정(暴政)을 펼치며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서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다음에 제11대 중종(中宗, 1488년~1544년)이 "왕"이 되었는데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훈구파"(勳舊派)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제14대 선조(宣祖, 1552년~1608년) 시절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해졌다. 인재를 중하게 썼고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 당쟁(黨爭)으로 붕당(朋黨)이 생겨났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을 통해서 "일본"과 두번의 전쟁을 가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명나라"(明, 지금의 중국)도 군대를 조선으로 보내서 동아시아 사회에서 세계 대전(世界大戰)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전쟁으로 인하여 국토가 황폐화(荒廢化)되었다. "선조"는 전쟁을 겪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균역법"(均役法), "작미법"(作米法)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두었고 지배층인 사대부 양반들의 거센 반대를 무릎쓰고 "속오군"(束伍軍)도 시행하였다. 전쟁 기간중에 민심을 수습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당시 활동한 인물로 "류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정철"(正鐵), "윤두수"(尹斗壽),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김성일"(金誠一), "송익필"(宋翼弼), "성혼"(成渾), "이원익"(李元翼), "신립", "이순신"(李純信), "권율"(權慄), "곽제우"(郭再祐), "김시민"(金時敏), 이이(李珥), 이황(李滉) 등이 있다. 제15대 "광해군"(光海君, 1575년~1641년) 시절 광해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황폐화 된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힘썼으나 당쟁에 휘말려서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반정(反正)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제16대 "인조"(仁祖, 1595년~1649년)는 북방의 외적(外敵)으로부터 굴욕적인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다, 이에 따라서 군영(軍營)을 설치했다. 제 21대 "영조"(英祖, 1694년~1776년) 시절 붕당(朋黨) 대립을 완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당쟁 제거의 대책으로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하였다. 균역법(均役法)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도 한계가 있었다. 당쟁으로 휘말려서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거론되자 이를 차단하려고 "사도세자"를 "뒤주"(곡류인 쌀 보관함)에 가두어 굶어 죽였다. 제22대 "정조"(正祖, 1752년~1800년) 시절 탕평책을 계승하고 인재를 가리지 않고 뽑았으며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켜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약용"(丁若鏞), "한백겸"(韓百謙), "이수광"(李睟光), "조익"(趙翼), "허목"(許穆), "유형원"(柳馨遠), "박제가"(朴齊家), "이제마"(李濟馬), " 박규수"(朴珪壽), "김정희"(金正喜), "홍대용"(洪大容) 등이 있다. "수원화성"(水原華城)을 건설하고 "정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여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능을 찾아뵙고 제례(祭禮)를 올렸다. 같이 행차에 따라온 문무백관(文武百官)과 함께 "수원 화성"에서 시간을 보냈다. 제26대 "고종"(高宗) 시절 자신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섭정(攝政)으로 자신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인 명성 황후(明成皇后)는 "일본"의 자객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외교적이고 정치적으로 독립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나라 이름을 바꿨고 개혁(改革)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를 읽는데 한계가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제27대 "순종"(純宗, 1874년~1926년) 시절 1910년에 "일본"에 통치권(統治權) 빼앗기고 일제(日帝)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순종"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결국은 "조선 왕조"는 멸망(滅亡)했다. 백성들은 "일제"(日帝)로부터 빼앗긴 국권(國權)을 되찾기 위해서 "독립군"(獨立軍)을 결성하여 곳곳에서 생겨나서 일제 세력과 맞서서 싸웠다.

*NAVER 백과사전 국어사전 참고함, 그 밖에 자료 참고함, 본인 작성.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급 신분상승운동 폐단  (0) 2018.05.19
조선 정도전 선택 평가  (0) 2018.03.15
고려 高麗 역사 평가  (0) 2017.04.23
고려 무신정권 진행 과정  (0) 2016.12.16
조선 사회 시장경제 경향  (0) 2016.11.25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