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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고려 후삼국시대 통일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19. 5. 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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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00년, 통일 신라(新羅)가 갈라져서 떨어져나가고 "후고구려"(後高句麗)와 "후백제"(後百濟)가 건국하여 3개의 나라로 분리되었고 다시 삼국시대(三國時代)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개성(開城, 송악) 지역에 신라의 왕족(王族)이자 승려(僧侶) 출신인 궁예(弓裔)가 고려(후고려)를 세웠다. 상주(尙州) 지역 출신의 신라 하급 무관(武官)이었던 "견훤"(甄萱)은 과거에 "백제" 영토였던 전라도 지역에 나라(후백제)를 세웠다. 이 중간에 송악(松嶽, 개성) 출신의 지방 세력가 바닷가 호족(豪族) 출신인 "왕건"(王建)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왕건"은 "궁예"를 "왕"(王)으로 받들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삼국 통일 전쟁에 뛰어들었다. 바다 해상 상인 집안 출신답게 해전(海戰)에 뛰어났다. 해전 성과 중의 하나가 바로 능창(별명 "수달")과의 서남 지방(西南海) 전투를 꼽을 수 있다. 그 해상전투에서 "왕건"은 송악(개성)에서 서해 바다로 전투함을 이끌고 남부 지방으로 내려 갔고 능창과 전투에서 이겼다. 그리고 후백제의 영토 일부를 차지하였다. 이 지역의 도시에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붙였다. 왕건은 전투를 벌이면서 여러 지방 호족들과 부딫혔는데, 지방 세력가들과 수 많은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로 인하여 왕건이 통일 고려 태조(太祖)가 된 이후 자식들간에 벌어진 왕권 다툼의 큰 원인이 되었다. 그 시대에는 왕실과 지방의 호족 귀족들과 혼인 동맹으로 자녀를 많이 낳았기 때문이다. 왕건은 장사꾼 집안 출신답게 이해 관계에서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데에 있어서 머리가 좋았다. 앞으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의 시기를 잘 알았다. 오죽하면 일개 신하(臣下) 중의 하나였던 "왕건"이 "궁예"가 세운 나라인 "후고구려"를 "궁예"를 몰아내고 자기가 대신 "왕"이 되었으니 왕건은 그때를 기다릴줄 알았다. "궁예"가 나라를 세우고 도읍(都邑, 수도, 首都)을 "송악"(개성)으로 자리잡았을 때부터 지방 토착 세력이었던 "왕건"이 훗날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틈틈히 기회를 엿보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후백제"는 건국 초기를 넘어서며 견훤의 아들들이 성장하면서 서로 다음대 왕위에 오르려고 극심하게 내분(內紛)이 겪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절에 가두었다. 그리고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이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했고 이후 "왕건'의 세력에 들어갔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견훤"을 전장(戰場)에 앞장세웠고 "견훤"을 알아본 후백제 군사들은 큰 혼란에 빠져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왕건 세력에게 전쟁에서 졌다. 이 싸움은 후백제가 멸망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반면에 왕건은 "신라"에게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양보와 타협을 내세운 "유화 정책"(宥和政策)을 폈다. 신라에 대한 전쟁은 최대한 피했고 다만 신라 왕실을 도움을 주는듯 하면서 내정(內政)을 간섭을 했다. 천년을 이어온 나라인 "신라"는 결국 온건파(穩健派)와 강경파(強硬派) 사이에서 큰 내분(內紛)이 일어났고 마지막에 "고려"의 세력에 들어가서 흡수 합병(吸收合倂)되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궁예 세력은 왕건 세력에 밀려났고 쫒겨났다.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승리자(勝利者)는 "왕건"이 되었다. 서기 925년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고려 주민으로 살아가게 하였다. "왕건"은 장사꾼 뱃사람 출신답게 이득과 손해 계산에 있어서의 능력이 뛰어났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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