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백제 담로 행정구역 해외 영토

느낌 . 2024. 10. 18. 15:16

 담로(擔魯)는 보통 백제 언어로 "다라", "드르"의 음차()로서 ‘성()’을 의미한다.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가진 지방지배조직으로서 왕족 출신의 자제를이 지방관으로 파견하였다. 양서(書) 백제전에서는 전국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담로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서의 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통치영역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 그러나 송서(書)나 남제서(書)에 보이는 백제왕이 신하를 왕이나 후()에 봉한 기사와 연관시켜 봉건 영지()로 담로를 보는 견해도 있다. 담로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건국 초기부터로 보는 견해와 웅진(사비, 부여)으로 천도한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지배 영역을 나누어 정했기에 근초고왕 대에 담로제가 처음 실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담로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계속 시행되었으나 백제가 사비로 천도를 이전과 이후로 지방 조직을 5방() 1군제()로 정비하면서 크게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양서에는 백제 전역에 22곳의 담로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웅진(熊津)에 도읍을 두었던 시기였다. 이점은 영토가 많이 축소된 시점의 기록이다. 백제의 영토가 더 넓었을 때는 전국에 50여 군데 이상의 담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담로가 처음 설치된 시기는 확실하지가 않다. 대체로 근초고왕(近肖古王, 346년~375년) 대를 전후한 시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담로의 설치는 일반적으로 근초고왕 때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고이왕 때부터 이미 좌평 벼슬 제도가 있었으므로 담로도 고이왕 때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설치된 지방 조직으로 중앙의 귀족이 수장으로 임명 받아 파견되었다. 그래서 담로의 수는 22개로 고정되었기 보다는 시간에 따라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는 부여계의 세력이 서울 한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세워진 국가로 초기에는 마한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였다.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은 대외정복사업을 벌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지방 행정조직을 다시 정비하였다. 22개의 담로가 있었던 시기는 60여년 간 지속되었던 웅진 시기인 무령왕 시대로 여겨진다. 이후 성왕이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지방 행정 조직은 수도의 5부와 지방의 5방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백제 성왕이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지방 행정 조직은 수도의 5부와 지방의 5방제로 재편되었다. 담로는 성왕(聖王, 523년~554년) 대에 5방제가 시행되면서 그 명칭이 사라졌다. 각 담로의 장의 명칭은 양서에 나와있지 않은데 사비 도읍기인 6세기 중반에 제작된 "지약아식미기목간"에 따르면 담로의 장을 "도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충남대 김수태 교수는 이 도사라는 명칭이 한성-웅진도읍기의 명칭을 사비도읍기에도 그대로 이어간 것으로 보았다. 노중국 교수는 신라의 도사제가 5세기 중반에 건립된 포항중성리신라비에 나와있는 것을 근거로 5세기 중반 이전에 만들어진 백제의 도사제를 신라가 수용했으리라 보았다. 해당 단어는 "담로"가 아닌 "염로"로 적혀있기도 하다. 양서 백제전의 원문에는 檐魯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檐이란 "염"으로 읽어야 한다고 설문해자(후한시대), 강희자(청나라) 등의 중국 사료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檐魯와 擔魯의 자형이 비슷해 생긴 오기로 서로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 일부 재야사학계는 1담로의 단위를 중국 동부 지역과 일본 열도까지 담로로 포함하려 하지만 백제의 군사력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중국 요서 진평군 지역의 백제 해외 영토의 경우는 비류왕 시기에 담로가 설치되어 늦어도 개로왕 시기에 중국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본인 작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위키백과, 나무위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