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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伽倻 탄생 과정 평가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1. 9. 2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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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伽倻)의 건국설화부터 알아보자. 가야 지역에 마을 촌장들이 모여서 근심을 하다가 구지봉(구수봉)에 올라서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고 한다. "구지가"의 노랫말 가사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이다. 이 노래를 부르자 하늘에서 자주색 끈 한가닥이 내려와 상자가 떨어졌는데 그 상자 안에 둥근 알 여섯개가 들어있었다. 알 다섯개는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가 이 성(城)에 있게 되었다. 성(城)에 남은 하나의 알은 맨 처음에 알에서 깨어나서 나왔으므로 수로왕(首露王)이라 불렀고 다섯개의 나마지 알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각기 다섯 가야의 군주(君主)가 되어 각기 다섯 지역의 나라를 다스렸다.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阿羅伽倻, 지금의 함안), 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상주), 대가야(大伽倻, 지금의 고령), 성산가야(星山伽倻, 지금의 경산), 소가야(小加耶, 지금의 고성)이고 김수로(金首露)가 왕(王)이 되어 다스리는 지역의 나라는 금관가야(金官伽倻)라고 불렀고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이다. 이렇게 가야 연맹 국가가 탄생했다.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당시의 서남 아시아의 인도에 위치한 아유타국(阿踰陀國, Ayodhya)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맞아들였다. 가야(伽倻, 伽耶, 加耶)는 신라 유리왕(유리이사금, 儒理尼師今) 19년에 경상도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12부족의 연맹체를 통합한 김수로왕의 형제들이 세운 여섯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김수로가 이끄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해서 처음에 여섯 가야가 있었는데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인 서기 562년에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신라에 병합(倂合)되었다. 가야(伽倻)는 삼국시대(三國時) 초중반의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여섯 가야를 부르던 이름으로 가야의 위치는 현대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상남도 대부분이고 부산광역시 전체 지역과 경상북도와 전라북도, 전라남도 3도 각각의 일부가 가야에 속했다. 삼한(三韓)의 중의 하나였던 변한(弁韓)에서 기원했으며 삼한 중 마한(馬韓)과 진한(辰韓)이 일찍부터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를 중심으로 정리됐던 것과는 달리 6세기 중후반까지 가야는 여러 작은 나라의 형태로 있었다. 대가야의 전성기 때는 호남의 동쪽 지방까지 진출하며 당시에 백제 지역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결국 가야권을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고 경상도 고령군 주변 지역만을 직접 통치하는 단계에서 머물렀으며 백제와 신라의 공격을 받으며 멸망하고 말았다. 3세기에 신라, 백제, 왜(倭, 지금의 일본) 등과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챙겼지만 백제 아신왕(阿莘王)이 왜군(倭軍)을 이용해서 신라 땅을 침범했고 공격을 하자 신라가 고구려(高句麗)에게 군사적으로 군대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이유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남진 정책(南進政策)을 내세웠고 왜군(倭軍)을 물리친다는 명목을 들어서 가야 지역까지 군사를 내려보냈다. 이 당시에 "고구려"로부터 "가야"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역사학계는 주장한다. 삼국 통일을 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전통 현악기인 "가야금"을 전한 우륵(于勒)도 가야 출신이었다. 가야에서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기름진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가 발달했고 품질 좋은 철(鐵)을 생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철"을 중국과 왜(倭, 일본) 등의 지역에 수출하기도 했다. 가야의 건국자들 중에는 과거에 한반도 이북 요동 이북 지방에서 내려온 부여족(扶餘族)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내려 정착했다. 가야는 품질이 좋은 "철"을 생산하면서 직접 "철"로 갑주(甲胄)와 검(劍) 등의 무기(武器)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시절에 마한(馬韓)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남쪽 가야로 내려와서 일시적으로 가야 연맹(伽倻聯盟)이 병합되기도 했다. 아라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체의 구성원이 되어 남서부 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다. 522년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고 신라는 529년 탁기탄(啄己呑, 경상남도 밀양)을 멸망시키자 가야 남부 지역의 여러 세력들은 대가야를 믿지 못하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고령가야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함녕군 (咸寧郡)의 옛 지명인 고령군(古寧郡)이 본래 고령가야였으나 신라가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 또는 고릉현(古陵縣)으로 부르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고령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삼국보다 발전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했다. 성산가야는 이 지역에 처음에 벽진국(碧珍國)이라는 독자적인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4세기 말 이후에 신라 영향권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소가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신라왕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4년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를 침략했다는 기사가 있다. 포상팔국은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에 있던 8개의 작은 나라이다. 마지막으로 금관가야는 본가야(本伽倻)라고도 부른다. 처음에 9촌(村)의 수장(首長)이 있어서 각기 마을 다스리다가 수로왕이 나타나서 9개의 마을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수로는 그때의 군장(君長)이 아니라 후대로 내려와서 본가야 중심의 6가야 연맹체를 결성할 때에 나타난 가야의 중시조(中始祖)로 보기도 한다. 수로왕 재위 기간 계속되다가. 금관가야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에 신라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지리적 위치가 낙동강 하류의 해안지대이므로 왜인(倭人), 한인(漢人)의 무역선(貿易船)이 바다에서 오고 가는 교류가 지속되었으며 그러므로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발달한 나라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기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金庾信) 가문은 금관가야계 유민들의 기존의 김씨 성을 진골귀족(眞骨貴族)과 구별을 하기 위해서 신김씨(新金氏)라고 고쳐서 불렀다. 그리고 금관가야 김유신 가문은 신라의 지배층 지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두산백과,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국유사(저자 일연 스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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