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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漢四郡 고조선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1. 10. 2.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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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고조선 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 부여 시조 동명(東明)

단군 왕검이 세운 고조선(故朝鮮)이라는 나라는 14세기 후반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나라인 조선(朝鮮)과 이름이 똑같아서 이름을 구별하려고 단군조선이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의 앞글자에 한자어 "옛 고"(古) 자를 붙여서 옛날에 있었던 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나라(漢)는 기원전 206년에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왕조로이다. 서기 9년에 왕망(王莽)이 정변을 일으켜 신나라(新)로 부르다가 25년에 한나라 왕조의 왕족인 유수(劉秀)가 신나라(新)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나라를 세우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다. 한나라(漢)는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漢四郡)은 기원전 108년에 중국 한나라(前漢)의 제7대 황제 무제(武帝)가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한 4개의 행정 구역이다.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을 설치했는데 이후에 고구려(高句麗)와의 전쟁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지고 현도군은 기원전 75년에 서북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낙랑군은 313년에 소멸되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영역 범위는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고 한다. 서기전 108년 한무제(武帝)에 의해 옛 고조선의 중심부에 설치되어 이후 약 400여 년간 동쪽 방면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침입할 수 있는 군사적으로 전방의 초소에 해당하는 전투기지 역할을 했다. 조선현(朝鮮縣)을 수현(首縣)으로 하고 11개의 속현을 거느리며 출발한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지였다. 임둔군(臨屯郡)은 그 위치에 대해서 함경도 지역이라는 설과 중국의 랴오둥(遼東), 랴오시(遼西) 지방이라는 설 등이 있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에 완전히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현도군(玄菟郡)은 서기전 75년에는 압록강 중류 지방에 있던 군치(郡治)가 요동(遼東)지역의 혼하강(渾河) 상류 지역인 흥경(興京) 지역과 노성(老城) 지역으로 이동했다.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는 군치가 이동한 이유를 이맥(夷貊)이 침범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서기전 1세기 전반에 한나라(漢)가 고구려(高句麗)에 대해서 대외정책이 강경책에서 유화책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당시 한나라(漢)가 동호족(東胡族) 중에서 내몽골 동쪽에 있었던 부족인 오환(烏桓, 烏丸)이 세력이 커져갔기에 한나라가 오환 부족의 세력을 군사적으로 몰어내기 위한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동시에 이맥(夷貊)에 대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맥에 대해서는 군현의 지배(郡縣支配)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압록강 중류와 상류에 살고 있던 주민 집단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이용해서 제1현도군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漢)는 현도군을 흥경 노성 지역과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으로 군치를 옮겨서 제2현도군을 설치하고 압록강 중류 상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 집단의 공격에 대비해서 현도성(玄菟城)을 쌓는 등 이민족의 공격에 대해서 대비하였다는 것이다. 서기 1세기 말 즈음에 고구려가 제2현도군에게 자주 침략하여 공격을 했는데 이로 인하여 제2현도군은 다시 무순(撫順) 지방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처음 요동군(遼東郡)의 속해있던 고현(高顯), 후성(侯城), 요양(遼陽) 등의 3개의 현이 분리되어 세력에 들어오면서 제3현도군을 형성했다. 후한(後漢) 시대 말기의 현도군은 낙랑군과 함께 삼국시대(三國時代) 초기에 요동 지역(遼東)에서 세력을 키운 공손씨(公孫氏)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위나라(魏)의 세력에 들어갔으며 그 뒤에는 현도군이 서진 나라(西晉)의 영토가 되었다. 서진 말기에는 고구려로부터 여러번 공격을 받아서 서기 315년에는 세력이 약해졌다.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漢四郡) 지역 모두가 한반도(韓半島) 지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요하(遼河) 서쪽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진번군(眞番郡)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의 자비령(慈悲嶺) 지역 남쪽에 있는 한강 이북의 지역이다. 기원전 82년에 낙랑군의 영토가 되었다. 이홍직(李弘稙)이라는 역사학자가 말하길 진번군의 북방설과 남방설을 제시했다. 진번(眞番郡)이 낙랑군(樂浪郡, 원조선) 이북에 있었거나 남쪽에 있었다는 설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북방설은 진번군이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설(遼東說)과 진번군이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설 그리고 진번군이 숙신(肅愼)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다. 진번군이 마한 지역에 있었다는 설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진번군이 진번재 충청도(眞番在)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충청도 및 전라북도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다. 첫번째 주장을 한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이나바(稻葉岩吉)이고, 두번째 주장을 한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이마니시(今西龍)이다. 진번군과 한사군 모두가 중국 요서 지역(遼西)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본인 작성, NAVER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어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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