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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U.S 지역 남북 전쟁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3. 2. 1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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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부터 독립한 미국(The United State of America)은 조금씩 발전을 했다. 남부 지방에서는 아프리카(Africa) 대륙에서 검은색 피부의 흑인을 강제로 데리고와서 노예(奴隸)로 판매하고 구입을 하며 거래를 했고 북부 지방에서는 노예 거래를 원하지 않았다.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에이브러함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1861년에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1863년에 링컨은 약 300만 명의 노예를 해방하기로 선언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주장했다. 신대륙 미국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자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Europe) 대륙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인해서 부르주아(bourgeois)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발전하면서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남부 지방에서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고 온 흑인에게 면화 밭에서 일을 시켰다. 당시 남부 지방에서 흑인은 백인들 사이에서 돈으로 거래를 하는 노예 신분이었다. 산업 혁명을 추진하고 있던 북부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인간을 돈으로 거래할 수 없다는것이 사회적인 분위기였다. 그리고 노예 제도에 반대했던 링컨(1809년~1865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 관계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되어 남부 7개 주는 이탈하였고 미국연방을 만들어 북부 지방에 맞서며 1861년에 남북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국은 처음에 남부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북부연방군이 조금씩 세력이 커졌다. 북부지방 23개 주의 인구는 2300만 명이었고 남부지방 11개 주의 인구는 총 900만명이고 이중에서 흑인 노예가 400만명을 차지했다. 물자와 공업력에서도 북부지방이 압도적으로 많고 컸다. 1863년 1월에 링컨은 미국의 300만 명에 이르는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다른 설명글을 참고하여 말하자면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은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4월 9일까지 미합중국(북부 연방)과 남부연합(남부 연맹)사이에서 벌어졌던 전쟁으로 결과는 북부지방의 승리로 끝이 났다. 미국에서 군복 색상에서 착안해 푸른 외투(북부 연방군)와 회색 외투(남부연합, Blue and Gray War)의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American Civil War(미국 내전, 內戰) 또는 그냥 The Civil War(내전)이라고도 부른다. 남북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흑인 노예 제도 유지에 대한 대립이었다. 세금, 자치 제도, 연방제 구조 등 여러 원인들이 있었으나 전쟁이 발생한 주된 이유는 노예 제도에 있었고 남부지방의 미합중국 이탈과 독립 전쟁은 흑인 노예 제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처음부터 남부지방이 관세(세금)에 민감한 경제구조를 만든 것은 흑인 노예 제도 때문이었다. 흑인 노예 제도는 연방 제도의 시작부터 커다란 논란거리였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흑인 노예 제도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영향으로 인간이 최소한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사상이 당시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흑인 노예 제도를 법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자마자 흑인 노예 제도가 별다른 이익을 남기지 못했던 북부지방에서는 흑인 노예 제도의 폐지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뉴저지 주 지역을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북부 주 지역들은 1850년대까지 흑인 노예 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하지만 흑인 노예 제도로 이익을 얻었던 남부지방 주 지역은 상황이 달랐고 이 차이는 20년간 국제 노예 무역 허용 등 각종 타협으로 이어졌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두번째 이유는 노예 가격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지방을 제외를 하면은 유럽 등 근대화된 국가에서는 흑인 노예 무역이 끝이난 시기였다. 미국도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흑인 노예 거래는 플로리다,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해서 불법 수입으로 이루어졌다. 흑인 노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었고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들은 전쟁 전 남부 사회를 단순히 노예가 있는 사회(Society with slaves)가 아니라 흑인 노예 제도 그 자체가 사회 구조의 핵심에 있으며 흑인 노예 제도 없이는 그 사회 자체도 유지될 수 없는 노예 사회(Slave Society)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배경은 근본적으로 흑인 노예 제도 유지 때문이었다. 북부연방은 전쟁 초반에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야전에 무장한 군대를 투입할 수 없었고 전쟁 초반에 남부연합에게 계속해서 패배하며 포토맥 강 근처까지 세력이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국력의 우위로 인해서 몇 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고 장비나 보급에 있어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전력상 우위를 놓치지 않았다. 남부연합은 북부연방 이상으로 전쟁 준비가 안된데다가 기본적인 국력이 북부연방에 비해서 세력이 약했지만 북부연방도 당장은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불리하지 않았다. 남부연합은 각 주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모인 자발적인 병력이었고 개개인의 목표 의식이 강했고 전투 의지도 높았다. 결과적으로 남북전쟁이 북부연방의 승리로 끝이 났다. "흑인 노예 제도 폐지"는 이루어졌다. 남부연합의 "오래전 반란군"을 없애려던 장관 스탠턴, 하원의원 새디어스 스티븐스, 상원 의원 찰스 섬너 등의 공화당 급진파가 몰락하고 공화당이 보수화되었다. 그러나 1876년 공화당이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덮기 위해 민주당과 타협을 하게 되면서 미국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예전에 백인이 흑인에게 대처했던 모습도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인 작성, NAVER 두산백과, 세계사 다이제스트100,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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