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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唐멸망-5대 10국 시대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3. 9. 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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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07년에 주온(朱溫, 朱全忠)이 당나라(唐)를 멸망시키고 양나라(梁)를 세웠다. 나라를 건국한 순서대로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라고 부르고 이 시기를 "5대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국 남부 지방과 파촉 지역에서는 전촉(前蜀), 오(吳), 민(閩),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남평(南平), 후촉(後蜀), 남당(南唐) 그리고 북부 지방의 북한(北漢) 등 모두 10개의 나라가 생겨났는데 모두 합쳐서 "5대 10국시대"라고 부른다. 5대에 속했던 5개의 나라를 소개하고자 한다.

후량(後梁, 907~923) - 도읍은 허난성 변경(汴京)이고 태조 주온(朱溫)은 각지의 변방의 적들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던 지역이 독립된 세력이어서 이들과 전쟁하면서 중앙집권화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이를 위해 추밀원(樞密院)을 숭정원(崇政院)으로 고치고 당나라 시대에 환관(宦官)이 맡았던 추밀사를 문관(文官)으로 대체하였다. 지방을 지배하기 위하여 금군(禁軍)을 지방에 파견하여 주둔시키고 각 진의 장관(將官)을 세습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번진(藩鎭)을 분할하는 방법으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지방 행정 장관의 권력을 높여 중앙 권력을 강화시켰다. 태조는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철저하게 집행되지 않았고 번진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은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번진 가운데 하동 절도사 이극용(李克用)과 주전충은 오랜 원한 관계로 인해 자주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존욱(存勖)이 절도사 자리를 계승해서도 후량을 공격해 왔다. 태조 주전충(朱全忠)은 큰 아들 우규(友珪)에게 죽임을 당했고 우규는 동생인 우정(友貞)에게 죽임을 당했다. 우정은 이존욱에게 패배하고 자살했고 후량은 멸망했다.
 
후당(後唐, 923∼936) - 돌궐(突厥) 사타부(沙陀部) 출신의 이존욱(李存勖)이 세운 국가이다. 당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대당(大唐)이라고 정했고 이연(李淵)이 먼저 세운 당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당(後唐)이라고 부른다. 장종(莊宗) 이존욱(923~926),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  926~933), 민제(閔帝) 이종후(李從厚, 933~934), 말제(末帝) 이종가(李從珂, 934~936) 등 4대에 걸쳐 14년 동안 이어졌다. 당나라 말기에 돌궐 사타부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은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되어 타이위안(太原)에 군대를 주둔했고 895년에는 진왕(晉王)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907년에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였던 주온(朱溫)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을 건국하자 그를 물리치고 스스로 일어섰다. 908년에 이극용이 죽은 뒤에 진왕의 지위를 이은 이존욱(李存勖)은 923년에 지금의 허베이성 다밍(大名) 지역인 위주(魏州)에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며 후당(後唐)을 건국했다. 그리고 그 해에 후량을 멸망시키고 뤄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후진(後晋, 937~947) - 돌궐의 일파인 사타족 출신의 석경당(石敬塘)에 의해서 936년에 건국되었다. 석경당의 성씨 및 북방 민족 출신을 따서 석진(石晉), 북진(北晉), 호진(胡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경당은 전란(戰亂)으로 폐허가 된 낙양을 버리고 카이펑(開封)으로 도읍을 정했다. 나라가 건국할 때 거란(渠丹)의 대규모 병력 지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석경당은 937년에 정식으로 나라 이름을 요(遼)로 고친 거란에 압박을 받으며 매년 막대한 공물(貢物)과 세폐(稅弊)를 바쳐야 했다. 이미 연운(燕雲) 16주 영토를 빼앗긴 상황에서 군사적 압박까지 당했다. 석경당이 942년에 죽은 뒤에 석경당의 형의 아들인 석중귀(石重貴)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요나라에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요나라 태종(太宗) 야율덕광(耶律德光)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후진으로 쳐들어왔고, 수도인 카이펑을 함락시킨 뒤에 석중귀를 사로잡고 포로로 삼아서 요나라로 끌고 갔다. 후진은 2대에 걸쳐서 10년 만에 멸망했다.

후한(後漢, 947∼950) - 돌궐(突厥)의 사타족(沙陀族) 출신으로 후진(後晉)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였던 유지원(劉知遠)은 후진이 거란(契丹)에 멸망하자 대량(大梁, 開封)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한(後漢)을 세웠다. 뒤를 이은 은제(隱帝)는 건국공신인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와 충돌하였고 난병(亂兵)들에게 피살되어 결국 후한은 2대에 걸쳐서 4년 만에 멸망했다. 그 뒤를 이어서 곽위가 후주(後周)를 세우자 은제의 숙부 유숭(劉崇)은 북한(北漢)을 세웠다.

후주(後周, 951∼960) - 태조 곽위(郭威)는 후한(後漢)의 추밀사(樞密使)였으나 은제(隱帝)가 그의 세력이 강함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 하자 대량(大梁, 開封)에서 군사를 일으켜 후한을 멸망시키고 951년에 왕이 되어 국호를 주(周)라고 하였다. 제2대 양자(養子) 세종(世宗, 柴榮)은 명군(名君)이라고 불리웠다. 근위군(近衛軍)을 개혁했고 중앙권력집중 정책을 펴고 통일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도중에 죽었다. 아들 공제(恭帝)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장군(將軍)들이 최고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을 황제로 받들오 모셔서 제위를 양도하게 하여 결국 960년 후주는 3대에 걸쳐서 9년 만에 멸망하였다. 서기 960년에 조광윤(趙匡胤)은 태조(太祖)가 되어 송나라(北宋)를 건국한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중국상하오천년사, 두산백과, 위키미디어 커먼즈,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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