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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원화 源花 화랑 花郞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22. 1. 30.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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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

삼국시대에 신라에서는 원화가 있었고 그러다가 원화가 없어지고 화랑이라는 집단이 생겼다. 원화(源花)는 신라시대에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익히며 예절과 무술을 닦던 청소년 단체이다. 그리고 그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화는 화랑(花郞)의 전신(前身)으로 진흥왕 시절에 귀족 출신의 처녀 두 명을 뽑아 단체의 우두머리로 삼고 300여 명의 젊은이를 거느리게 하였는데 이 두 명의 여성 수장이 서로 시기하는 폐단 때문에 폐지되었고 남성을 수장으로 삼는 화랑으로 고쳤다. 화랑(花郞)은 신라 시대에 두었던 청소년의 민간 수양 단체였다. 문벌과 학식이 있고 외모가 단정한 사람으로 조직하였으며 심신의 단련과 사회의 선도를 이념으로 하였다.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는 제24대 진흥왕 37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두었는데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가 없어서 걱정했고 그래서 무리를 모아서 여럿이 모여서 어울리도록 하여 행동하는 모습을 살펴본 후에 그 중에서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조정에 임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간택하니 남모(南毛)라는 여성과 준정(俊貞)이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삼백명의 무리를 모으기도 하였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어서 서로 싸우더니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많이 먹게 하고 심하게 취하게 한 후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살해하였다고 한다. 준정은 참형에 처해졌고 따르던 무리들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졌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고 화랑(花郞)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받들게 하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때로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때로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유람했고 즐겨서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그 사람이 그른지 바른지를 알게 되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가려서 뽑아서 신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 기록에는 어진 재상과 충신은 여기 화랑을 거쳐서 성장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들은 이로 말미암아 생겼다고 기록했다. 최치원이 남긴 "난랑비서문" 기록에는 우리나라 신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류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상은 유불선의 3가지 가르침을 포함하며 중생을 교화하자는것이 목적이었다. 예를 들면은 집에서 효도하고 집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것이 노사구(魯司寇) 공자의 뜻이요 모든 악업을 짓지 말고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하는것이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고 기록했다. 당나라(唐) 영고징이 저술한 "신라국기" 기록에는 신라에서는 귀인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이 사람들을 떠받들어 섬겼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원화(源花)는 화랑의 전신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 이후 신라에는 연령별로 뽑아서 만든 청소년 단체였는데 촌락 또는 씨족 단위로 조직된 이 단체를 통해서 청소년들은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익히고 예절과 무술을 연마했다. 화랑은 교육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회 구조를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사회 단체였다. 신라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해나가며 마침내 서기 6세기 전반 무렵에는 신라가 경상도 지역을 차지하는 고대국가로 성장했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게 되자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의 양성과 선발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에 화랑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신라 진흥왕 재위 기간에 원화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답고 미모가 여쁜 여염집 처녀를 임명하였는데 단체의 수장 자리에 여성을 뽑았던 것은 종교적 의례에서 여성이 차지했던 지위가 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 시절에 개편된 청소년 단체에도 여전히 종교적 역할의 수행이 요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신라 중후반기에 관료 제도가 정비되었고 남성들의 역할과 임무가 중시됨에 따라 원화제가 화랑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삼국간의 마찰이 심해지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신라시대에 태종 무열왕(武烈王) "김춘추"와 경문왕(景文王) 등이 화랑 출신이었는데 이렇게 왕실과 국가의 중요한 인물들 중에서 화랑 출신 인물들의 비중이 높았다. 그래서 화랑 출신 사람들은 국가의 중대사에 깊이 관여했다. 신라 내물왕의 7대 손으로 급찬(級飡) 벼슬을 한 구리지(仇梨知)의 아들인 사다함(斯多含)과 김유신(金庾信), 관창(官昌) 등도 화랑 출신이었고 이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삼국사기 신라본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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