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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골 진골 골품 제도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22. 7. 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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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는 왕이 될 수 있는 계급 신분이 따로 있었다. 신라의 귀족 지배 계급은 "성골"과 "진골" 핏줄 계급 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골품 제도라고 부른다. 성골 계급은 신라 왕실에서 왕이 될 수 있는 핏줄의 가문이었고 진골 계급은 귀족 가문의 지배 계층이었지만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성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 모두가 왕족인 신분이었고 진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에 한사람만 왕족인 성골 신분이거나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진골 출신인 경우였다. 신라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자주 근친혼이 이루어졌다. 근친혼이라는것은 쉽게 말해서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끼리도 서로 결혼을 하는 제도인데 이렇게 근친혼을 했던 이유는 혈연으로서 더욱 단단한 내부 결속과 단합을 하기 위함이고 왕실의 후일에 자손이 끊어지는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고육지책이었다. 성골인 덕만 공주는 자신의 아버지의 동생인 마지막 남은 성골 남성인 국반 갈문왕과 결혼을 했다. 하지만 서기 579년 신라 제26대 진평왕 재위 시절에 다음의 왕위에 오를 성골 신분의 태자를 얻지 못하자 진평왕은 자신의 맏딸인 덕만 공주가 진평왕의 뒤를 이어서 서기 632년에 왕이 되었다. 여성으로서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여왕으로 제27대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 재위 기간 이후에도 성골 신분의 태자를 정하지 못하였고 결국은 진평왕의 동생 국반 갈문왕과 박씨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승만 공주가 태자가 되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진골 귀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유신에 의해서 반란은 진압되었고 비담도 죽임을 당했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구족이 멸하였다. 서기 647년 승만 공주가 왕이 되었다. 제28대 진덕여왕이다. 당시에 신라의 진골 귀족 김춘추는 당나라 군사들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귀족들이 의논하여 신라 왕을 결정하는 화백회의를 폐지시켰다. 그리고 김춘추는 그의 할아버지인 신라 제25대 진지왕이 폐위되어 물러나자 성골 신분에서 진골 신분이 되었다. 성골 귀족 출신이 아니라 진골 귀족으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었다. 제29대 태종 무열왕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 동생인 "문희"와 젊은 시절에 결혼을 했는데 그 이후 김춘추는 왕이 되고 나서 자신의 딸인 지소 공주를 늙은 나이의 김유신과 결혼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성골 귀족과 진골 귀족 구분이 없어졌다. 성골 귀족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제도가 없어지자 진골 귀족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서로 왕이 되려고 너도 나도 군사를 일으켜서 피 비린내 나는 반란을 일으켰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서기 887년에도 대를 이을 태자를 정하지 못하게 되자 헌강왕의 누이 동생이 왕이 되었다. 제51대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은 각간 벼슬을 하고 있던 자신의 작은 아버지인 "위홍"과 불륜에 빠져서 나랏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이에 더해서 통일 신라 영토의 모든 지역에서 어려워진 나라 살림에 농민들이 한탄하며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의 정치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백성들의 생활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실 사회 분위기는 곧이어 후삼국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줄 새로운 영웅이 세상에 나타나주기를 바랬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원했다. 그러는 사이에 신라 왕실은 점점 무너져갔다.

*본인 작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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