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한제국 덕혜옹주 영친왕

일제강점기-한민족 독립운동사

by 느낌 . 2022. 8. 4. 09:14

본문

덕혜옹주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德惠翁主)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녀 공주(1912년~1989년)이다. 고종의 막내 딸로 13살에 일본으로 볼모로 가서 대마도 도주(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했다. 그 이후 38년이 지난 뒤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1897년~1970년)이다. 이름은 은(垠)이고 광무 4년(1900년)에 영왕에 봉해졌다. 융희 1년(1907년)에 조칙에 따라서 황태자에 봉해졌으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강제로 일본에 보내서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을 했다. 그리고 8.15 해방 이후 1963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덕혜옹주(德惠翁主)는 고종의 고명딸이고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여동생이다. 어머니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이다. 양씨는 처음에 궁녀였다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다. 덕혜(德惠)는 1921년에 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이다. 사실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는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였다.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어 줄 정도로 덕혜옹주를 아끼었다. 1925년에 13살이던 덕혜옹주를 일제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보내서 일본 황족과 화족의 어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女子學習院)에 편입학을 시켰다. 영친왕 부부는 덕혜옹주가 아카사카 저택에서 지내며 학교에 통학하는 것을 바랬으나 일본의 반대로 가쿠슈인 학교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덕혜옹주는 늘 항상 정신적으로 신경쇠약으로 고생했다. 짧은 시간 동안만 영친왕, 이방자와 함께 살았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8살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맺었다. 하지만 1931년에 일본 데이메이 황후가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를 후견인으로 두고 있던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을 덕혜옹주와 결혼시켰다. 결혼한 지 1년쯤 후에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을 낳았는데 이름은 마사에(正惠)이고 한국식으로 읽으면 "정혜"이다. "마사에"는 아버지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에 1955년에 1살 많은 스즈키 노보루(鈴木昇)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하여 살았다. 1962년에 김장한의 형인 신문 기자 김을한의 노력으로 37년 만에 일본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덕혜옹주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85년에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일본에서 사망했고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에 덕혜옹주도 76세의 나이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했다. 영친왕(英親王)의 이름은 은(垠)이고 아명은 유길(酉吉)이며 호는 명휘(明暉)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이다. 1900년에 영친왕(英親王)이라는 봉호(封號)를 받았으며 1907년 이복형인 순종(純宗)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을 때 형인 의친왕(義親王)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로 순종이 이왕(李王)으로 불리게 된 뒤에는 이왕세자(李王世子)가 되었다가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제2대 이왕으로 즉위하였다. 1907년 황태자가 된 뒤에 조선총독부의 통감(統監)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후견인으로 삼아서 일본에서 생활했으며 1911년 일본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였다. 1915년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하였다. 1920년에 일본의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한국이름 이방자)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첫째아들인 이진(李晉)은 1922년 한국을 방문하던 와중에 죽었다. 1926년에 순종이 죽자 창덕궁(昌德宮)에서 이왕(李王)의 자리에 올라서 왕이 되었다. 1931년에 둘째 아들인 이구(李玖)를 낳았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여 1940년에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43년에 일본의 제1항공군(第1航空軍)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인으로 살다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에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47년에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 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일본 국적도 잃었다. 영친왕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친왕은 1957년에 다시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고 미국으로 이민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인 이구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59년 3월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인 1962년 12월 15일에 한국 정부가 영친왕 부부가 대한민국 국적을 허락했고 이듬해인 1963년 11월 22일에 영친왕이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이방자 여사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70년 5월 1일에 사망했다.

*본인작성, 나무위키, NAVER 국어사전, 두산백과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