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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 삼별초 사병 집단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11. 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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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三別抄)는 1232년(고려 고종 19년)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최이)가 수도 개경의 밤순찰과 수비를 위해서 특별한 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했는데 군사의 수가 많아지자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이름 지었고 몽골 제국과 전쟁이 일어나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도망쳐서 돌아온 병사들로 신의군에 편성하여 하나로 합쳐서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사병 집단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군인 부대이다. 최우 집권기에 치안을 목적으로 조직한 경찰 업무를 하는 좌별초의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게 되었다. 대몽 항쟁에서 군사적 활약을 하였으나 대몽 강화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발하여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 전라도 남해안에 있는 섬인 진도를 본거지로 하여 3년 동안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과 전투를 하다가 1273년에 진압되었다.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야별초에 대한 기록에는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좌별초, 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고려 고종 44년)과 1258년에 나온다. 그래서 야별초의 설치는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 정권 말기로 보기도 한다.
 
야별초(夜別抄) -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궁성과 향촌 사회의 치안을 함께 수행했다. 이것은 중앙 정부 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서 치안 유지의 공백 상태를 야별초가 대신하였다고 판단된다. 고종 때의 집권자 최우(崔瑀)가 도성(都城) 안에 도둑이 많아서 이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개성(개경)에서 밤에 성 안을 순찰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도둑의 무리가 전국에서 일어나 야별초 세력을 확대하였다. 점차 기능과 권한이 확대되고 인원도 많아져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어 편성하게 된 것이다. 도둑을 잡고 몽골의 침략을 하자 몽골군과도 싸웠다. 이후에 다른 조직과 통합을 거듭하며 삼별초의 전신이 되었다.
 
마별초(馬別抄) - 고려시대 무신정권 때 최우가 창설한 사병(私兵) 기병부대로 보병인 도방(都房)과 함께 최씨 정권의 중요한 무력 기반이었다. 이후에는 삼별초의 하나가 되었다 화려한 마구와 장식을 갖추고 의장대 역할도 하기도 했으나 무신정권의 무너지자 함께 없어진다.  1229년(고려 고종 16년)에 최우가 자기 집에 재추(宰樞)를 초청하여 구정(毬庭, 격구하는 마당)에서 도방(都房)과 마별초의 격구(擊毬) 기사(騎射) 등을 관람하게 하였다고 한다. 마별초에 대한 기록으로는 "고려사절요"에서 고려 고종 16년 10월 기록에 나온다. 마별초는 최씨정권 호위와 자택 경호 기능을 하였다. 최항 이후로는 마별초에 대한 기록이 없다.
 
가별초(家別抄) - 조선 태종 11년(1411년) 6월에 가별초를 재편성했는데 모두 조선에 집이 있는 백성으로 편입하여 여진의 거주하던 군민(軍民) 세력을 약화시켰다. 가별치(加別赤), 별초(別抄)는 특별히 가려 뽑은 정예병이고 가별초는 말 그대로 가문의 무기로 무장한 사병이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조선시대로 넘어가려는 시기에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 세력은 가별초를 보유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거느리던 가별초가 가장 유명하고 군공도 많았다. 가별초 군사 수는 1000명~3000명으로 추산되며 원나라 간섭기에 목조 이안사를 따라 전주에서 삼척, 삼척에서 동북면 의주(원산) 지역으로 이주한 백성의 후손들과 동북면 토착민, 여진족, 한족과 몽골 그리고 일본인까지 아우른 혼성 기병 부대이다. 가별초는 이성계가 이끌며 수도 개경 탈환전, 함흥평야 회전, 황산대첩, 길주 전투, 제1차 요동정벌, 호바투의 침공, 몽골의 장수였던 나하추와의 전투, 위화도 회군 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면서 이성계가 고려 제일의 무장이 되고 나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 건국 이후 조선 군대에서 왕실 근위대 역할을 수행하다가 태종 이방원의 사병혁파 때 해체된다. 전투 군사로서 조선 전기의 중앙군 5위 중 하나인 호분위대나 친군위대로 전환되었고 적은 수의 군사는 갑사(역사)로 소속되어 배치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한국고전용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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