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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권의 군사 정치 기관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11. 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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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政房) - 고려 시대 최씨(崔氏) 무신 세습 정권 당시 정무(政務)를 행하던 장소이다. 고려 고종 12년(1225년) 최우(崔瑀)가 자기 집에 설치하여 문무 백관의 인사 행정을 관장하였는데 백관의 승강, 임명, 이동에 관한 이른바 전정(銓政)의 모든 권한을 장악하여 이때부터 국왕은 정방의 주의(注擬)를 승인하는 형식만 취할 뿐 모든 인사 행정이 정방에서 이루어졌다. 정방에는 임금에게 입주(入奏)하는 직책을 맡은 정색승선(政色承宣)을 두었다. 최우의 막료로서 3품관이면 정색상서(政色尙書), 4품 이하면 정색소경(政色少卿), 서류를 쓰는 사람은 정색서제(政色書題)로 삼았다. 또 정방에서 일을 보는 문사를 필도치(必闍赤)로 삼았다. 정방은 최씨 집권 때와 최씨가 몰락한 후에도 오랫동안 존재하고 이어져서 고려 말기에는 지인방(知印房), 차자방(箚子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고려 창왕 때에는 상서사(尙瑞司)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당(政堂), 정사당(政事堂), 죽당(竹堂) 이라고 불렀다. 최충헌(崔忠獻) 때부터 이미 자기 집에서 문무백관의 인재 인사 행정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최우가 이것을 공식 인사기구로 설치한 것이다. 무신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국가 기관으로 변해 존재하여 이어지다가 1388년(고려 우왕 14년)에 폐지되었다. 정방은 무신정권기에 행정실무에 어두워 문학과 이무(吏務)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무신 집권 계층과 벼슬길에 진출을 원했던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지지를 얻으며 설치되었다. 이것을 통해서 최씨 정권은  문무양반의 지배자가 되었고 권력이 강하되었다. 문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무신정권 무너진 이후에도 국가 기관으로 남게 되었다. 
 
도방(都房) - 고려시대 무신정권기(武臣政權期)에 무신집정의 사병 집단으로서 1179년(명종 9) 집권한 경대승(慶大升)이 처음으로 조직하였다. 도방이 생기기 이전에도 이미 유력한 무장들은 제각기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료에서 문객(門客), 가동(家僮)이나 악소(惡小), 사사(死士), 용사(勇士), 장사(壯士)로 표현된 사람들이 바로 사병이었다. 그렇지만 이 단계의 사병은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이 단계를 넘어서서 사병을 조직을 크게 해서 하나의 기구로 만든 것이 도방이었다.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집권한 경대승은 정권의 탈취 과정에서 동료였던 대부분의 무신들을 적으로 돌려야 했고 이 때문에 보다 안전하고 조직적인 자신의 신변 보호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사 100여명을 모아서 문하에 두고는 도방으로 삼았다. 그러나 1183년(고려 명종 13년)에 경대승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도방은 1200년(고려 신종 3년)에 최충헌(崔忠獻)이 큰 규모로 다시 조직하였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김준(金俊)이 집권한 뒤에는 자신의 무인 집정 기간에 신변 호위와 그의 집권체제에 대한 무력적으로 뒷받침을 하는데에 횔요했다. 그리고 무신 정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도방은 해체되었다. 도방은 사병집단제로서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후에는 숙위대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도방의 구성원들은 공동으로 행동을 같이 하면서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처음에는 단순히 경대승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등장했으나 이후에는 비밀탐지, 반대 세력의 숙청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집권자 가문의 권력 세력을 배경으로 약탈과 살상 피해 등을 주었기에 그 폐단이 컸다.
 
중방(重房) -  고려시대의 상장군과 대장군의 회의 기관이다. 무신 정권 초기인 정중부와 이의민의 집권 때에는 정치 운영의 중심 기구가 되었다. 이후에 최충헌 집권기에는 교정 도감이 중방의 역할을 하였고 중방은 다만 형식적인 제도로 고려 말기까지 존재되어 이어졌다. 중방의 설치 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2군 6위의 군사제도가 완성된 고려 현종의 재위 시기로 보고 있다. 전체 구성원은 16명인데 반주(班主)라고 불리는 응양군(鷹揚軍)의 상장군이 중방 회의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궁궐. 도성의 수비와 치안을 2군 6위가 하는 임무와 관련된 주요 안건을 다루었다. 1170년(고려 의종 24년)에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등이 정변을 일으켰고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문신이 권력을 독차지한 고려 전기 때와는 다르게 중방은 막강한 정치권력 기관이 되었다. 집권한 무신들이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고위 관직을 차지했고 중방에 모여서 국가의 모든 문제를 공동으로 처리해서 그 기능과 권한이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궁성 수비와 일반 치안을 위한 병력 배치 형옥치죄권(刑獄治罪權)을 행사하고 도량형 도구의 검사하고 통일하고 관직을 내리고 거두고 관리를 임명했다. 정중부,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으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초기 무신 정권 시대에는 집권 무신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래서 중방을 통해서 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독자적인 집정부(執政府)를 형성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소(敎定所)라고도 부른다. 최충헌이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게 되자 최충헌을 살해하려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1209년(고려 희종 5년) 4월에 청교역(靑郊驛, 경기도 개풍군)에서 역리(驛吏) 3명이 최충헌, 최우(崔瑀)를 살해하기 위해서 승도(僧徒)를 모으고자 공첩(公貼) 문서를 사찰(절)에 돌렸는데 귀법사의 승려가 공첩을 가지고 온 자를 최충헌에게 고발한 사건이 일어났다. 최충헌은 이에 관련된 자를 잡아하기 위해서 개경(開京)의 흥국사(興國寺) 남쪽 영은관(迎恩館)에 임시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계속 제도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어 최씨정권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었고 서정(庶政) 감시, 세정(稅政), 비위(非違) 규찰(糾察)과 제반 명령 하달 등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 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무신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겸임하는 교정별감을 두었다.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김준(金俊), 임연(林衍)의 무신정권에서도 존재하여 이어지다가 1270년(고려 원종 11년) 임연의 뒤를 이은 임유무(林惟茂)가 피살되어 무신정권이 끝남으로써 없어졌다. 국가의 행정을 이끌고 전국의 공물과 특별세 등 세정(稅政) 사무 및 인사행정을 담당하였다. 규찰 기능은 교정도감의 설치 배경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는데 이후에도 권력을 가진 신하들의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인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수장(首長)은 교정별감에서 원칙적으로 장군의 직위에 있는 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왕으로부터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최고 무신집권자가 자동적으로 계승하였다.
 
*본인 작성, 두산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상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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