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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삼국시대 형성 통일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4. 2. 1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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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魏, 220년~265년)는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후한(後漢, 25년~220년)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후한(後漢)이 좌원에서 고구려의 공격으로 혼란에 빠지자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황건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대륙의 중원 지방 각 지역에서 군벌들이 일어났다.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고 나서도 해산하지 않고 정권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원소"가 정권을 잡으려고 환관들을 살해하고 궁궐을 장악하였는데 황제가 탈출을 하였고 그 다음에 "동탁"이 황제를 찾아서 데리고 낙양 지역으로 돌아와서 정권을 잡았다. 그러자 원소가 군사를 일으켰고 위협을 느낀 동탁은 낙양에 지역에 불을 지르고 장안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왕윤"의 계략으로 동탁의 양자였던 "여포"가 동탁을 죽였고 195년 헌제 황제는 장안에서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196년에 "조조"의 설득으로 허창 지역으로 갔고 그러면서 조조가 황제를 인질로 권력을 잡았다. 원소는 조조와 전쟁을 하였고 관도 지역에서 조조가 큰 승리를 거두고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조조는 적벽 지역에서 패배를 당하였고 유비와 손권이 따로 나라를 세웠다. 220년에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魏)를 세우고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자 "유비"가 세운 촉나라(蜀)와"손권"이 세운 오나라(吳)와 함께 대륙의 중원 지역을 3등분하고 서로 칼을 겨누는 형세가 되었다. 위나라는 "사마의"가 죽은 후에 그의 손자인 "사마염"이 220년~265년 동안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사마염은 265년에 왕위를 찬탈하고 진나라(晉)를 세웠다. 서진(西晉, 265년~317년)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에서 위촉오 삼국시대는 중국 후한에서 서진 사이에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중국의 통일 왕조인 후한이 멸망하면서 군벌들의 세력 싸움 끝에 조위(曹魏), 촉한(蜀漢), 손오(孫吳)라는 3개의 나라로 갈라졌으나 마지막에는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이 천하를 통일시켜 삼국시대는 끝이 났다. 위촉오 삼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대의 사건이다. 400년간 중국을 통치한 통일제국 한나라(漢)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위나라는 자신들이 한나라의 지위를 대체함을 선언하였으나 촉한과 오라는 두 거대 지방정권은 위의 명분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 자신들도 칭제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 기간동안의 중국은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기였다.  새로운 통일제국 진나라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3개 독립정권이 병존했던 분열기가 바로 이전의 한나라 시대 및 이후의 진나라 시대와 구별되는 독립된 시대로서의 삼국시대였던 것이다. 유비가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흔히 부르는 촉나라가 아니라 한나라이다. 유비가 한나라의 후계자라고 스스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당장 조선시대의 문학 판소리 "적벽가"만 해도 첫머리가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 시절"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중국사 연구나 대중매체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부른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은 보통 하나의 한나라 역사로 다루는 편이 많으나 촉한의 경우엔 삼국시대 자체가 혼란의 분열시대였으며 그 정통성에 있어도 논란이 있기에 사학적으로 따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말 삼국의 전란기를 거치며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지방 자작농이 전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서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비대해진 관료제와 유교의 사상 독재하에서 세력을 키워온 호족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삼국의 군주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해 호족연합체를 넘어서는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셋 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위나라에서는 호족들 가운데 문벌이 높은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장악하여 호족을 뛰어넘는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위진 남북조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가 형성된다. 이것이 중국사에서의 문벌귀족의 시작이다. 오나라에서는 강남이라는 미개척지 특유의 성격으로 호족들이 강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호족연합체"적인 정권이 형성되었으며 오의 군주인 손씨 가문도 사실상 강동 지역 호족이자 그 연합체의 맹주와 같은 위치였다. 오나라 계통 호족은 오나라의 붕괴 이후에도 서진에 등용되면서 귀족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촉한에서는 영토가 작고 옛 한나라의 계승을 표방하여 한의 문물을 갖추려고 했던 덕분에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족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결국 중국을 통일했던 것은 호족에 의해 세워진 친 호족국가 서진이었다. 삼국이 서진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이 모두 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이 호족 세력들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사마씨의 서진의 패권을 인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 결말은 결국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재통일하는 것이었고 애초부터 호족 출신으로 위나라의 조씨보다 더 억지스러운 찬탈로 제위를 차지하여 권위가 약할 수 밖에 없었던 사마씨는 그나마 호족들을 제어해 보려는 시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결국 당나라 말기까지 왕조는 망해도 귀족 가문은 변하지 않았다.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문벌 귀족의 전성기가 열렸다.

*본인 작성, NAVER 나무위키(삼국시대-중국), 삼국사기 백제본기(부연 설명, 도서출판 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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