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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黃巾賊홍건적紅巾賊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3. 11. 1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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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건적 (黃巾賊)
홍건적 (紅巾賊)

황건적(黃巾賊) - 황제와 맺어진 사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황제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왕의  외척 세력과 환관(내시)들이 기회를 보았다. 그리고 후한(後漢)의 황제는 대부분 나이가 수명이 짧아서 일찍 죽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농민들이 고통을 당했다. 그러자 대규모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건적의 난"으로 약 30년 간 전쟁이 이어졌다. 후한은 중국사에서도 외척과 환관의 횡포와 비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대였다. 이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오랜 기간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 정도의  존재였다. 환관 제도는 중국, 우리나라, 베트남 그리고 고대 이집트나 페르시아, 그리스, 동로마(東Roma) 등의 나라에서도 시행되었다. 전제군주에 봉사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고 거세를 하고 후궁이 많은 궁궐 안의 연락 사무 등을 맡게 하였다. 농민들은 비리가 난무하는 조정 관리들의 정치권 싸움에 농민들만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메뚜기 떼가 곡식의 수확에 피해를 입히고 홍수와 가뭄 등 자연 재해로 민심이 잠점 동요했다. 그러자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太平道), 오두미도(五斗米道) 등의 도교적 신흥 종교가 성행하고 유행하였다. 서기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黃巾賊)의 난은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였다. 규모가 36만명 가까이 되어 중국 대륙으로 퍼져나갔는데 황건군은 주모자 장각이 죽고 동생인 장량, 장보가 죽자 그 세력이 약해졌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漢)의 왕위를 찬탈하여 위나라(魏)를 세웠다. 후한(後漢)의 광무제로부터 196년 전한(前漢) 고조 황제 고조로부터 422년간 이어져왔던 존속했던 한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홍건적(紅巾賊) - 홍건의 난(紅巾之亂)은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이라고 부르는데 원나라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다.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났고 1351년에는 가노(家奴)에게 황하(黃河)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일으킨 반란이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어지럽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각 지역을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의 규모가 10만명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나라(宋)라고 하였다. 서기 1354년에 대규모로 토벌군을 이끈 몽골족의 토구다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자 몽골족의 토곤 테무르에게 살해를 당했고 이것을 칸의 권력 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지도하에 3개 군으로 나뉘어 북벌 전쟁을 일으켜서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벌였다.1359년(고려 공민왕 8년)에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군대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서 의(義), 정(靜), 인(麟), 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평양)을 점령하였다. 1360년에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 가까이 되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도망친 적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수군(水軍)으로써 황해도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노략질하다가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에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공민왕은 그 해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에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공격하게 했다. 이성계는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군대 2000명으로 개경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홍건적을 직접 공격하고 홍건적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죽이며 개경을 제일 먼저 되찾았다.
 
*본인 작성, NAVER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황건적의 난), 위키백과 (홍건적의 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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