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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환관 宦官 인물 열전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3. 9. 1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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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환관
중국 환관 정화의 무역로 세계 지도

환관(宦官)은 거세(去勢)를 한 남자가 궁궐에서 일하는 직책이다. 그들은 신체 특성상 여성들의 숙소에서 경호원이나 하인 등으로 일했다. 내시(內侍)는 조선시대에 관리 가운데 하나로 대궐 안의 음식물의 감독하고 왕명의 전달하고 궐문의 수위했으며 청소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을 가리키는데 거세된 남자만이 담당할 수 있었다.
 
채륜(蔡倫) - 중국의 후난(湖南) 출신의 환관으로 새로운 종이를 만들었다. 중국은 그동안 필기의 재료로 비단이나 간독(簡牘 대쪽과 얇은 나무쪽) 등을 사용했는데 전한(前漢)시대에는 이미 풀솜이나 마를 펴서 만든 종이를 사용하였다. 당시 궁중의 집기 등을 제조하고 관리하는 상방령 (尙方令)이란 직책을 맡고 있던 채륜은 이 기술을 발전시켜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 그물 등을 합쳐서 분쇄하여 종이를 값싸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 발전된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렀다. 채륜이 발전시킨 제지법은 동아시아에 확산되어 학문이나 예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14년 용정후(龍亭侯)로 책봉되어 장락(長樂:福建省) 태복(太僕,卿)이 되었으나 안제(安帝) 즉위 후에 정쟁에 말려들어 자살하였다.  

십상시(十常侍) - 중국 한나라(漢) 영제(靈帝) 때에 장양(張讓), 조충(趙忠),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필남(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리(韓悝) 등 10명의 환관이다. 중국 후한 말 영제(靈帝, 156~189) 때 조정을 장악했다. 영제는 십상시에 휘둘려서 나랏일을 뒷전에 둔 채 거친 행동을 일삼아 제국을 쇠퇴시키고 결국 망하게 한 인물이다. 당시 십상시는 넓은 봉토를 소유하고 정치를 장악해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 부모 형제들도 높은 관직을 얻어서 큰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후한 189년 8월 25일 발생한 십상시의 난에서 2000여 명의 환관이 죽으면서 동탁(董卓, ?~192)이 정권을 잡게 된다.
 
조등(曹騰) - 지금의 중국의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 출신이다. 조맹(曹萌)의 아들로 형은 조포(曹褒), 동생은 조정(曹鼎)이다.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아버지인 조숭(曹嵩)의 양아버지로 229년에 위나라의 제2대 왕인 명제(明帝) 조예(曹叡)에게 고황제(高皇帝)로 추존(追尊)되었다. 이는 환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왕으로 추존된 사례이다. 환관들의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순제는 135년(순제 10년)에 환관들이 양자를 얻어 봉작을 세습할 수 있게 했다. 순제의 총애를 받은 조등은 순제의 재위기간에 중상시(中常侍)의 자리까지 올랐고 순제가 죽은 뒤에도 제11대 환제(桓帝) 때까지 궁중의 실력자로서 큰 권한을 행사했다. 환제 때에는 비정후(費亭侯)로 봉해졌으며 황후궁의 업무를 관장하는 대장추(大長秋)를 지내기도 했다.

황호(黃皓) - 황호(黃皓, ? ~ ?)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환관이자 간신이다. 유선(劉禪)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잡고 나라를 어지럽게 한 그의 행동은 촉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지연의 서서에서는 등애와 사마망이 강유에게 패배하자 양양 사람 당균(黨均)을 시켜 성도의 황호에게 뇌물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뇌물을 받은 황호는 당균과 함께 강유가 위나라에 항복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강유는 군사를 물리게 되었다. 가충(賈充)이 사마소에게 강유를 암살할 것을 건의하자 종사중랑(從事中郎) 순욱(荀勖)은 강유가 답중에 머무르는 것이 황호의 농간 때문이므로 군사를 보내 촉나라를 정벌해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호가 등애 부하에게 뇌물을 바쳐 죽음을 면하고 낙양에 도착해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진 후 사마소에 의해 저자 거리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고역사(高力士) - 당나라 고주(高州) 양덕(良德) 출신으로 풍앙(馮盎)의 증손이다. 환관 고연복(高延福)이 길러 자식으로 삼아 성을 고씨로 바꾸었다. 환관이 되어 현종(玄宗) 때 내시성(內侍省)의 일을 맡았는데 사방으로 보내는 공문서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위씨(韋氏)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커서 현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근면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발해군공(渤海郡公)에 봉해졌고 황제의 총애가 지극했다. 숙종(肅宗)이 태자였을 때 형(兄)의 예로 섬겼다. 표기대장군을 거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올랐다. 안사(安史)의 난 때 현종을 모시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숙종 상원(上元) 원년(760년) 무주(巫州)로 방축(放逐)되었다가 두 해 뒤 사면되어 돌아오는 도중 병으로 죽었다. 당나라 때 환관이 권력을 잡은 것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중국 당나라(唐) 현종(玄宗) 때의 환관(宦官)으로서 위황후(韋皇后)와 태평공주(太平公主)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현종(玄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권세를 부려 당나라(唐) 후기(後期)에 환관(宦官)의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길을 열었다.
 
왕진(王振) - 중국 명나라 때의 환관(?~1449). 영종() 환심을 사서 권력을 잡았다정통(14(1449년) 몽골 오이라트부의 수령 에센이 침입하자 영종을 부추겨 함께 출전했다가 토목(전투에서 패해 영종은 붙잡히고 자신은 죽었.
 
위충현(魏忠賢) - 명나라 말기에 중국 하간부(河間府) 숙녕(肅寧) 출신으로 무뢰배 출신으로 스스로 거세를 하고 이진충(李進忠)으로 이름을 바꾸어 행세를 하다가 만력제(萬曆帝) 때 환관이 되어 궁중에 들어가 성씨를 회복하고 충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사사롭게 황장손(皇長孫) 주유교(朱有校, 熹宗)의 유모 객씨(客氏)와 합심하여 같은 무리가 되었다.
 
정화(鄭和) - 본명은 마삼보(馬三寶, 1371~1434)이다.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將軍)이자 환관이었고 무관(武官)이자 제독(提督) 그리고 전략가, 탐험가, 외교관, 정치가였다. 영락제(永樂帝)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서 남해 바다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성씨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씨인데 이는 중국 전통시대 이슬람교 신자들이 마씨를 성으로 삼은 풍습에서 유래했다. 이름은 삼보(三保)였다.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이 되었기에 중국에서는 삼보태감(三保太監, 三寶太監)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였고 가장 멀리까지 도달한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현재의 케냐 말린디)였다. 국제 무역 장사꾼 상인으로도 크게 기여하였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한국고전용어사전, 시사상식사전, 위키백과, 중국역대인명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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