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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 東濊 옥저 沃沮 역사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1. 10. 3.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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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東濊)- 동예는 서기 1세기 초에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 지역에 있던 부족 국가였다. 풍속과 언어
(language, 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으나 입는 옷의 형태는 달랐다. 명주와 삼베 등의 옷감을 만드는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고 해마다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추수 감사제 명절이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시절에 동예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동예는 지금의 원산 지역과 안변 지역에서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 지역의 동해안 지방과 강원도 북부지방에 거주했던 고대시대 종족이었다. 동부지방에 살고 있던 예맥 예족(濊貊 濊族)이라고 불렀다.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기록에는 3세기 전반 무렵에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沃沮)와 가까이에 있고 남쪽으로는 진한(辰韓) 가까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낙랑군(樂浪郡)에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게 복종하며 가까이에 있었는데 서기전 108년 한나라(漢)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멸망하자 한나라가 원산 지역과 안변 지역을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했고 동예의 북부 지역은 한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서기전 82년 임둔군이 멸망했고 서기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이 고구려 사람들이 공격으로 요동 지방으로 물러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옥저와 동예지역의 7개 현은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를 받았다. 동부도위는 동예의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 감영, 監營)를 두었다. 2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서기 245년에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락하여 공격했는데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 등이 동예를 영토로 삼으려고 쳐들어갔다. 이때 동예의 주요 읍락들이 위군(魏軍)에 항복했다. 고구려가 위나라 군대에 도읍(수도)가 함락되는 피해를 입고 세력이 작아졌다. 그러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그 이후에 진나라(晉)가 세력이 약해졌고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하여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그러자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2∼412) 시대에 영토 전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많은 마을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동해안에 있던 동예 마을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광개토대왕비 비석의 기록에는 예족(濊族)이 서기 5세기 전반까지도 다른 종족과 구분되는 하나의 종족단위로서 존재했는데 고구려와 신라가 지방 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강화했고 영토에 속한 지역 간에 교류가 증가하는 등의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동예인은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영토 백성으로 들어가서 합쳐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서 하나의 종족적 단위로서의 존재는 멸망하여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역사서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는 동예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시기에 산과 하천을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서 주민들이 함부로 다른 읍락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점를 어겼을 경우 노예(奴隷)나 소, 말 등의 가축으로 보상해야했다. 책화(責禍)라고 부른다. 같은 성씨(姓)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병으로 죽으면 그동안 살던 집을 버리고 다른 집으로 옮겼다. "호랑이"를 신(神)으로 숭배했다. 불내예(不耐濊)는 동예의 마을 중에서 대표적인 형태로서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후기까지 한군현의 관직명이 사용되는 등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았다. 서기 245년 위나라 군대(魏軍)의 침략과 공격을 받았을때 위나라 군대에게 항복을 했고 서기 247년에 불내예후는 위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치면서 불내예왕으로 책봉(冊封)을 받아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불내예왕이 사는 곳은 일반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어 별다른 구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옥저(沃沮)- 옥저는 함경도의 함흥 지역에 있던 부여(夫餘) 계열의 부족이 세운 나라이다 이후에 고구려(高句麗)의 영토가 되었다. 동옥저, 북옥저, 치구루置溝婁)로 나누어져 있었다. 함흥 지역을 중심으로 살았던 집단을 동옥저(東沃沮)라 불렀고 두만강이 있던 지역의 집단을 북옥저(北沃沮)라 불렀다.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서기 3세기 전반에 동옥저의 가구 수는 5천여 호(戶)였고 해안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걸쳐있던 마을이 1천여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로 기름진 바닷가 평야지대에서 농사를 지었고 어업에 종사했다. 언어는 고구려와 거의 똑같았고 먹는 음식과 입는 옷, 살던 집의 형태, 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나라들 사이에 둘러쌓여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영향권에 있었다. 서기전 2세기말 중국의 한나라(漢)가 위만조선이 멸망시키고 한군현(한사군, 漢四郡)을 설치되는 과정에서 옥저는 서기전 107년에 현도군(玄菟郡)의 일부가 되었다. 현도군은 요동 지역(遼東)에서 개마고원을 넘어서 동해안으로 이르는 동쪽과 서쪽을를 이어지는 공도상(孔道上)에 설치되었는데 그 동쪽 끝이 옥저 영토였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서기전 75년 현도군이 요동 지방의 흥경 지역에 노성 지방으로 쫓겨감에 따라서 동옥저는 현도군에서 분리되어 동예와 함께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세력으로 들어갔다. 서기전 30년에 동부도위가 없어짐에 따라서 동옥저의 마을들은 낙랑군 아래의 현(縣)이 되었다. 이후에 고구려의 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진출해오자 옥저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서기 244년 관구검(毌丘儉)이 이끄는 위나라(魏)의 군대가 고구려의 동천왕(東天王, 227∼248)을 공격하고 옥저까지 이르자 그곳의 마을들을 침략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위나라 군대가 물러났고 고구려의 옥저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옥저에 속해있던 마을들은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각 마을의 족장(族長)이 자치적으로 마을 안의 일들을 다스렸다. 옥저가 고구려에 공물로 보리, 밀, 생선, 소금, 해산물, 여인(女人) 등을 바쳤다. 북옥저(北沃沮)는 치구루(置溝婁)라고도 불렀다. 북옥저는 읍루(挹婁)와 가까이에 있었는데 읍루족(挹婁族)의 제물을 강제로 빼앗고 사람을 다치게 했다. 서기 285년에 부여(扶餘)는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연나라(燕)의 모용씨(慕容氏)가 침략과 공격을 했는데 연나라가 부여의 수도를 무너뜨렸고 옥저왕이 자살을 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부여 왕실과 중심 세력이 옥저로 피난을 갔다. 이 당시 북옥저의 영토는 두만강 유역으로 추정한다. 부여 왕실은 진나라(晉)의 지원을 받아 고국을 회복하고 다시 예전의 영토로 돌아갔다. 부여 왕실이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던 당시에 부여국의 일부 세력이 옥저에 그대로 남았는데 이 세력을 동부여(東扶餘)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 광개토대왕 시절에 동부여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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