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5~6세기 가야 연맹 왕국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3. 9. 9. 13:51

본문

 
가야 연맹(伽倻聯盟)은 가야의 소국들이 연맹체를 형성한 조직이다. 크게 경상도 김해 지역에서 수로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5세기 이전까지 존재했던 전기 가야 연맹과 5세기 후반부터 경상도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 가야연맹(前期伽倻聯盟)은 경상도 김해 지역에서 수로왕이 건국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42년부터 5세기 이전까지 존재했던 가야 연맹이다. 400년에 가야와 왜(倭)의 연합군이 고구려에 크게 패배하면서 금관가야가 쇠퇴하였다. 그리고 532년에 신라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 후기 가야연맹(後期伽倻聯盟)은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된 이후에 경상도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5세기 후반에 복원된 가야 연맹체이다. 6세기 초반에 신라와 백제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대가야의 성장이 약화되었고 562년에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

비자발(比自㶱) - 삼국시대 이전의 마한 진한이 존재했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에 속해있던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에 있던 소국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적으로 볼 때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진한 계열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등 확실치가 않다. 경상도 창녕읍에 오늘날 남아있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이 나라 수장급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 창녕 지역에 있었던 이 정치체제는 각종 문헌에서 비자벌(比子伐, 창녕 척경비석), 비지국(比只國: 삼국사기 본기), 비자화(比自火, 삼국사기 지리지), 비자발(比自㶱, 일본서기), 비화가야(非火伽倻, 삼국유사), 불사국(不斯國, 삼국지 위서)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창원에 있었다고 보는 설과 경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경상도 창녕이라고 보는것이 정설이다. 삼국유사에서 6가야를 소개할 때 "가락국기"의 6가야와 "본조사략"에서 6가야를 동시에 소개하는데 가락국기의 6가야가 교과서에도 있는 잘 알려진 그 6가야고 본조사략에서는 소가야가 빠지고 비화가야가 들어간다. 비지국이 있던 창녕 지역은 북쪽으로는 반로국(대가야), 남쪽으로는 안야국(아라가야) 등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이후에 창녕 척경비 비석을 세웠다.
 
남가라(南加羅, 下加耶) - "하가야"라고도 부르는데 역사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이다. 삼국사기 잡지 악조에 기록된 하가라도(下加羅都)의 하가라에서 가라를 가야로 치환해 조어한 것이다. 가야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데 그 가운데 가라의 경우이 가야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특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가야는 현재의 김해 일원에 존재했던 금관가야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옛 역사서에는 하가야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학계 일부에서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고령의 대가야를 상가야로 남쪽에 위치한 금관가야를 하가야로 개념화한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악조에 수록된 우륵 12곡(于勒12曲)의 곡 제목에서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가 확인된다. 상가라가 고령의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만 하가라가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하'라는 글자에 주목하여 고령보다 남쪽에 위치한 가야이고 전기에 가야 연맹을 주도했던 가야라는 의미를 담아 금관가야를 하가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와 달리 상가라, 하가라 모두 대가야 연맹을 주도한 핵심세력으로 보면서 하가라를 합천군 쌍책면 혹은 봉산면 일대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하가야를 금관가야로 볼 경우 김해 대성동(大成洞) 고분군에 묻힌 인물들이 하가야의 중심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고령과는 달리 김해 일원의 고고학 자료에서 5세기 중엽 이후의 유력한 세력의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워 학계에서는 상가야에 대응하는 하가야가 실제 존재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탁국(㖨國, 啄己呑國) - "탁기탄국"이라고도 부른다.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세기말∼6세기 초에 고령의 대가야가 추봉(推封,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비정)까지 세력을 뻗칠 때 후기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522년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 동맹이 이루어졌고 대가야 왕에 의하여 주변 소국들에 분산 배치된 신라 왕녀 수행인들의 변복(變服) 문제로 가야 연맹의 내부에 분쟁이 생겼다. 신라가 이를 계기로 창원 영산 지역 방면을 공략하자 그 와중에 무력의 열세를 느낀 탁기탄국의 함파한기(函跛旱岐)가 신라 측에 함께 공격하면서 멸망했다. 후기 가야 소국 중에서 가장 먼저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멸망한 연대는 529년을 전후로 한 2∼3년간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와 계체기(繼體紀) 흠명기(欽明紀) 등에 탁국(啄國) 또는 탁기탄국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하여서는 종전까지 대체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었으나 최근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나 문헌사료상의 정황 증거로 보아 경산은 적합하지 않으며 영산, 밀양 방면의 한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안라국(安羅國) - "안야국"이라고도 부른다. 삼한 시대에 교역 등을 통해 성장하던 안야국(安邪國)은 3세기 말 발생한 포상팔국(浦上八國)과의 전쟁과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을 통한 영역 확대로 안라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5세기 안라국의 발전은 기록으로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당시 전형적인 함안 토기 유형인 화염문 투창 토기의 분포를 보아서 안라국의 영역이 5세기에 확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이후 안라국의 정치적 성장을 보여 주는 근거는 "일본서기"의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繼體紀)의 기록이다. 안라국의 최고 지배자를 왕-국주(國主)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안라국의 왕권 성립을 보여준다. 또한 이와 함께 차한기-하한기 등의 지배층이 기록되어 있다. 영토 확장으로 안라국에 편입된 지역의 수장층으로 추정되는 "대인"이라는 계급도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지배 계층의 분화는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대가야처럼 '현'과 같은 지방 제도를 시행하였음을 가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왕권 확립과 지배 계층의 분화 등은 안라국이 하나의 고대 국가로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고대 국가로서의 안라국의 발전은 6세기에 대외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529년에 안라에서 개최된 안라 고당 회의(安羅高堂會議)는 안라국이 가야 제국을 백제와 신라로부터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었다. 백제 성왕의 요구에 의해 개최된 541년과 544년의 사비 회의에서도 안라국은 가야 제국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여하였다.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은 계속되었고 결국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 제국은 신라의 진출을 막기 위해 백제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인 554년 관산성 전투에 안라국과 가야 제국은 백제 편에서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가야 제국은 신라의 영역으로 복속되어 갔다. 안라국의 멸망 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60년경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추측한다.

다라국(多羅 國) - 우리 사서(史書)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다라(多羅) 또는 다라국(多羅國)의 형태로 보이는 가야의 한 나라이다. 양직공도는 중국 남조의 양(梁) 나라에 온 사신들을 그린 그림이다. 양 무제(502~549) 때에 소역(蕭繹, 508~554)이 그리고 그 머리말을 지었는데 만들어진 시기는 526~539년 사이로 추정된다. 각국 사신을 그린 그림의 옆에는 그 나라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가야사와 관련하여서는 백제 옆에 있었던 소국들의 위치와 성격이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백제에 대한 설명문 속에 "백제 인근의 소국에는 반파(叛波), 탁(卓), 다라,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가 있다"고 하여 백제 근처에 위치한 나라의 하나로 다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서기 흠명(欽明) 2년(541) 4월조에 "다라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라는 기록이 있다. 하한기는 다라국의 관직이며 이타는 사람 이름으로 짐작된다. 이는 이미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耶) 등을 재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이다. 임나부흥회의 또는 임나복건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는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544년에 한번 더 개최되었다. 이때도 다라는 회의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이수위(二首位)의 직위에 있는 흘건지(訖乾智)라는 인물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보면 다라는 관직 제도를 갖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다라는 가야 멸망 기사인 562년(흠명 23) 춘정월조에도 보인다. "신라가 임나의 관가를 공격해서 없앴다. 통틀어 임나라 하고 세부적으로 분류해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嗟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이라고 하여 합해서 10국(國)이다"라고 한 기사에서 보이고 있다. 여기서 다라는 신라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다 멸망한 대가야와 최후를 같이한 가야국으로 보인다. 그 멸망의 시기는 562년으로 추정된다. 다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소재하였을 것으로 비정해왔다. 이는 합천의 옛 이름이 대량(大良) 또는 대야(大耶)로 다라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소재한 옥전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옥전고분군을 다라국 지배 집단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고분군과 1㎞ 정도 떨어진 곳에 다라리(多羅里)가 존재한다는 점은 이곳에 다라국이 존재했었다는 유력한 근거이다.
 
탁순국(卓淳國) -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후기 가야 13국 중의 한 나라였다.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 또는 구사군(仇史郡)이었으며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己叱己利)라고도 하였다.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40년대로 추정된다. 탁순국은 교역을 통하여 성장한 나라로서 이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는 6세기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백제가 섬진강 하류인 하동까지 진출하고 신라가 김해 지역 등의 가야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탁순국은 인근 가야의 여러 나라들과 백제,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탁순국은 가라국(고령의 대가야)이 신라와 맺었던 혼인 동맹을 파기하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신라가 김해 지역으로 진출하면 탁순국의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에 탁순국은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안라국(오늘날의 경상남도 함안)과 결탁하였다. 안라국은 백제가 하동 지역으로 진출함으로써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왜를 참여시켜 국제회의인 고당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여기에 탁순국도 동조하였다. 하지만 신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고당회의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탁순국주(卓淳國主)는 왜에 구원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왜는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신라는 가야 지역으로 계속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탁순국이 멸망한 시기는 532년에서 541년 사이이다. "일본서기"에 541년까지 탁순국이 나타나고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한 경로로 볼 때 김해 지역 다음으로 창원 지역이었고 김해가 신라에 멸망하는 것이 532년이기 때문이다. 탁순국주가 신라에 자진 투항함으로써 탁순국도 스스로 투항한 김해 지역처럼 다른 지역에 비해서 높은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屈自郡)으로 삼았으며 757년(경덕왕 16)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본인 작성, NAVER 국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나무위키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