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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후백제 건국 멸망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22. 8. 1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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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 왕

신라 말기 전라도 지역에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한 견훤(甄萱, 867년~936년)은 경상도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으로 합통(咸通) 8년 정해년(서기 867년)에 태어났다. 처음의 성은 이씨(李氏)였는데 나중에 스스로 견씨(甄氏)로 성씨를 고쳤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4명의 아들과 딸 한명을 두었고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견훤은 나머지 형제 중에서 더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 어린 아기였던 견훤이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고 어머니는 밥을 나르러 갔었다. 견훤을 수풀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해지고 특이했으며 기개가 호방하고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아자개의 첫째 아내는 상원부인이고 둘째 아내는 남원부인이다. 남원부인은 아들 3명과 딸 1명을 낳았는데 용개, 보개, 소개, 대주도금이고 견훤과 능애는 상원부인의 자식이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가 농사를 짓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경상도 상주)을 차지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불렀다. 견훤은 신라 왕실의 군인 출신이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 원년(892년)에 서남쪽 지역을 공격하여 무진주(武珍州, 전라도 광주)를 습격해서 왕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스스로 "신라서면 남도통행 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이라 했다. 제51대 진성왕 6년에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이 완산주(完山州, 전라도 전주)를 거점으로 후백제(後百濟)라고 이름을 짓고 마침내 스스로 왕이라고 하고 나라를 건국했다. 무주(武州, 전라도 광주)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여 소속되었다. 삼국시대에 의자왕을 끝으로 나당동맹군에게 백제는 멸망했지만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것은 백제부흥운동을 다시 성공시킨 경우로 볼 수도 있다. 신라 제52대 효공왕 5년 가을 8월에 후백제왕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경상도 합천)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금성(錦城) 남쪽으로 군사를 옮기면서 부근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효공왕 13년 여름 6월에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을 앞세워서 바다를 건너 병선(兵船)을 이끌게 하여 진도군(珍島郡)을 굴복시키고 고이도성(皐夷島城, 전라도 영광 서쪽 해안)을 격파하여 후백제의 서남쪽 영토를 빼앗았다. 효공왕 14년 견훤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명을 이끌고 나주성(羅州城, 전라도 나주)을 포위하여 열흘이 경과하도록 풀지 않았는데 궁예가 왕건과 수군(水軍)을 보냈고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신라 제53대 신덕왕 5년 가을 8월에 견훤이 다시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 원년 여름 6월에 궁예는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왕건이 고려(高麗)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경명왕 원년 가을 7월에 경상북도 상주에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여 왕건에게 항복했다. 경명왕 3년 겨울 10월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명을 이끌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진례(進禮, 충청도 금산)로 진군하였다. 왕건이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를 듣고 물러갔다. 신라 제55대 경애왕 2년에 견훤이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건은 후백제에 사촌 아우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경애왕 3년 여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고려에서 진호를 일부러 죽였다는 설이 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진호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며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 충청도 공주)까지 진군하였다. 경애왕 4년 가을 9월에 견훤은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군 임고면 일대)를 공격했고 신라의 왕경(王京, 경상도 경주)을 습격하였다. 이때 경애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희를 베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후백제의 군사가 쳐들어 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뛰어 들어갔고 친척 및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그러나 견훤은 찾아내어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에게 욕을 보이고 죽게 했다. 왕궁에 있는 재물을 찾게 하여 빼앗았고 경애왕의 먼 친척 동생인 김부(金傅)를 신라의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경순왕 원년 12월에 견훤이 대목군(大木郡)에 침입하였다. 경순왕 2년 여름 5월에 강주(康州)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경순왕 3년 겨울 10월에 견훤이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경순왕 4년 봄 정월에 고창군 병산(古昌郡 甁山, 경상도 안동) 전투에서 견훤이 크게 패배를 했고 고려는 이 전투의 승리로 후삼국시대 통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장흥(長興) 3년(932년) 가을 9월에 견훤은 일길(一吉)을 보내 서해 바다에서 북쪽으로 수군(水軍)을 보내어 고려의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와서 사흘 동안 머물며 염주(鹽州, 황해도 연백), 백주(白州, 황해도 연백), 정주(貞州, 경기도 개풍) 3주의 배(선박) 100척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었는데 아들이 10여명이었고 그 중에서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더욱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은 이 사실을 알고 금강에게 왕위를 빼앗길까봐 걱정했다. 양검이 강주(康州, 경상도 진주) 도독으로 있었고 용검은 무주(武州, 전라도 광주) 도독으로 있었다.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을 시켜서 강주, 무주 등으로 사람을 보내어 동생들이 군사를 이끌고 오게 했다. 서기 935년 3월에 금강은 죽었고 신검은 자신의 아버지인 견훤을 지금의 전라도 김제(金堤)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두었다. 그 이후 신검은 후백제의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금산사에 석 달 동안 갇혀 지내다가 그 해 6월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전남 나주로 도망쳤다. 그리고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왕건에게 항복하고 자신과 식솔들을 데리고 고려로 갔다. 서기 936년 후백제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고려군이 견훤과 함께 갔는데 후백제 군사들은 살아있는 견훤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전쟁은 끝났고 후백제는 고려에 항복했다. 왕건이 견훤의 아들인 신검의 목숨을 살려주자 견훤은 화가 나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심하게 앓고 있던 등창(종기)이 터져서 죽었다.

*본인작성, NAVER 지식백과 인물한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유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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