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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려제동맹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22. 9. 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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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부여족(夫餘族)이다. 부여의 같은 핏줄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예맥족(濊貊族)이다. 부여라는 나라에서 갈라져 나와서 각자 나라를 세웠다. 주몽(高住蒙)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고 훗날 남쪽으로 내려와서 졸본 부여에 고구려를 세웠다. 온조(溫祚)는 주몽의 왕비였던 소서노(召西奴)와 함께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백제를 세웠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한핏줄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서로 창과 칼을 들고 맞서며 싸우던 서로 다른 제도와 풍습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체제의 독립국이었다. 고구려, 신라(新羅), 백제, 가야(伽倻)는 서로 외적의 침입을 막거나 적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마다 수 없이 서로 군사 동맹 조약을 맺었고 필요가 없어지면은 미련없이 동맹 조약을 파기하기를 반복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도 비슷한 경우였다. 고구려는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북방민족과 대립하고 있었고 백제도 서해 바다를 건너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영토를 정복하던 시대가 있었다. 백제는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시절과 동성왕(東成王) 재위 시절이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정복해서 영토로 가지고 있던 시대였는데 당시에 아무리 백제군의 군사력이 강했다고 해도 백제 세력 군사만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은 다른 나라와의 동맹을 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을까. 결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해있던 고구려가 답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서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의 이민족과 싸웠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는 의자왕(義慈王) 시절에도 부여성충(夫餘成忠)이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淵蓋蘇文)과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려제동맹(麗濟同盟)을 맺고 돌아갔다. 그때 와있던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는 옥에 갇힌다. 백제는 이렇게 려제동맹을 맺음으로서 북방 지역을 안심하고 신라를 주적으로 삼아서 공격할 수 있게 있었다.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상도 합천)을 공격했다. 대야성 성주였던 품석(品釋)은 자기 부하였던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았고 크게 실망한 검일은 백제에 투항을 하고 대야성 안의 군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 백제의 부여윤충(夫餘允充)에게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古陀炤)는 항복했지만 죽임을 당하고 두 사람의 잘린 머리는 백제의 사비성 감옥 바닥에 파묻혔다. 세월이 흘러서 신라와 당나라(지금의 중국)는 서로 나당동맹(羅唐同盟)을 맺었다.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수십만명의 군사를 지원받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 왕조를 멸망시켰고 백제 유민들은 옛 백제 땅에서 백제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때에 백제부흥군은 고구려와 려제동맹을 다시 맺고 군사적으로 지원을 받게 되었다. 백제부흥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부흥운동에 같이 함께 했던 고구려 지원군이 배신을 할까봐 이들을 죽여서 없애면서 려제동맹은 자연스럽게 파기되었다. 그리고 백제부흥운동은 전력이 예전보다 약해졌다. 그리고 백제 지도부는 스스로 무너졌다.

*본인 작성, 조선상고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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