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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백제부흥운동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22. 8. 1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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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족 부여풍

백제부흥운동은 서기 660년 의자왕 20년에 백제가 멸망한 뒤에 660년에서 663년까지 백제 왕족과 군인 등이 중심이 되어 백제 유민들이 백제 왕조를 다시 세우려고 일으킨 전쟁이다. 660년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명의 군사가 육로로 갔고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만명의 군사는 바닷길로 가서 백제를 공격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 의자왕(義慈王, 641년∼660년)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피난을 갔다. 제2왕자 태(泰)가 남아서 사비성을 방어했으나 1만명이 죽고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나당연합군은 이어서 웅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에 당나라 군대는 의자왕과 왕자 그리고 정부 고위 관리 90여 명, 군인, 기술자 등 약 2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바닷길로 당나라로 돌아갔다.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년∼661년)도 10월에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로 돌아갔다. 백제 영토 안에는 당나라 군사 1만명과 신라 군사 7천명이 남아서 지켰다. 당나라는 백제 영토 내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부여복신(福信), 흑치상지(黑齒常之), 고구려 승려 도침(道琛)을 중심으로 백제 유민들은 나당군과 맞서 싸웠다. 661년 1월에 왜(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불러와서 백제왕으로 삼았고 달솔(達率) 흑치상지는 부장 10여 명과 함께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을 거점으로 하여 10일 만에 3만명의 병력을 모아서 소정방이 보낸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2백개의 성을 회복하였다. 의자왕의 친척 사이인 부여복신은 고구려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 지역을 차지하고 굳게 지키며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백강(白江)과 사비성 중간지점에 있는 주류성에는 소정방이 직접 사비성을 공격했기에 백제 병력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으로 쳐들어가서 사비성 남쪽으로 진격해 목책을 설치하고 나당연합군을 공격하자 남아 있던 백제군이 거느리고 있던 20여 성이 복신의 세력에 들어갔다. 태종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이례성(尒禮城,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을 공격해 되찾았고 백제부흥군 세력에 들어갔던 20여 성이 모두 신라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백제부흥운동이 크게 패배를 당하자 복신은 임존성으로 퇴각했고 흑치상지와 합류해 사비성 공격을 다시 계획하였다. 복신은 661년 4월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왕자 부여풍의 귀국을 서둘러 간청했다. 복신은 먼저 유인궤의 군대와 사비성의 유인원(劉仁願) 군사가 서로 합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임존성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서 주류성으로 진출하고 백강 하류 연안에 목책을 세우며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에 복신은 도침과 의견이 엇갈려서 도침을 죽였다. 도침이 죽게 되자 백제부흥운동에 있어서 부흥군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당나라는 손인사(孫仁師)에게 7천명의 병력을 주어 백제부흥군을 치게 했고 신라도 군사를 보냈다. 고구려로 향하던 신라군은 방향을 백제쪽으로 돌려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였다. 당시에 지금의 대전 부근에 있던 옹산성을 비롯해 사정성(沙井城), 정현성(貞峴城) 등 대부분의 성들이 백제부흥군의 손에 들어감으로써 웅진성과 사비성에 있는 나당연합군의 보급로가 끊어져 있었다. 보급로가 끊김으로써 굶주리고 있었기에 나당연합군은 옹산성을 먼저 탈환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백제부흥군 역시 일본으로부터의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고전을 하고 있었다. 662년 5월이 백제 왕자 부여풍과 함께 170척의 병력과 무기, 군량 등을 실은 일본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662년에 부여복신과 부여풍은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본영을 옮겼다가 663년 2월 주류성으로 되돌아왔다. 왕자 부여풍은 부여복신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킬까봐 미리 복신을 죽였다. 백강 전투(白江戰鬪)가 663년 8월에 백강(현재의 금강 하구 부근)에서 벌어졌는데 백제와 왜(일본)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싸운 전쟁이다. 바다와 육지에서 수륙 양면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으로 왜의 지원군을 전멸시켰고 이로 인해 백제 부흥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주류성은 함락되었다. 백강 전투 결과 백제부흥운동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그 기세가 꺽였다. 북부 지역의 거점인 임존성만은 지수신(遲受信)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으나 주류성의 함락과 동시에 대부분의 성읍들이 나당군에 항복하였다. 그래서 임존성은 고립되었다. 당군은 임존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항복한 백제군을 동원하여 임존성을 공격하게 하여 663년에 임존성도 함락되었다. 그리고 4년 동안의 백제부흥운동 전쟁은 끝이 났다.

*본인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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