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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진흥왕 나제동맹

고대시대 백제-고구려시대

by 느낌 . 2022. 8. 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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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신라 진흥왕
신라 진흥왕 재위 시절 영토 확장 지도

나제동맹(羅濟同盟)은 신라와 백제가 맺은 군사동맹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장수왕(長壽王) 시절 서기 427년에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 지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추진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 지방에 있던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막으려고 서기 433년에 군사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가 백제에 군사를 보내서 공격을 하면은 신라가 군사를 보내서 백제를 도와주었고 반대로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를 보내서 공격을 하면은 백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신라를 도와주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후로 그의 아들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서기 47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개로왕(蓋鹵王)을 죽이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지금의 충청도 대전(大田) 지역 이남까지 영토를 넓혔다. 당시에 신라는 1만명의 구원군을 보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기 481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7개의 성(城)을 점령하였고 미질부(彌秩夫, 지금의 경북 포항 지역)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서기 493년에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혼인하면서 서기 433년에 혼인 동맹을 맺으며 백제와 신라의 동맹 관계가 확고하게 성립되었다. 무령왕(武零王)의 아들인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은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수도(도읍)를 옮기고 왜(倭, 지금의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며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부흥을 이끌고자 했다. 서기 551년에 신라의 진흥왕(眞興王)과 백제의 성왕은 함께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리고 북진(北進)을 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 지역을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강원도 북쪽 지역으로 계속해서 올라갔다. 서기 551년에 백제는 한산성(漢山城) 지역을 되찾았다. 성왕은 진흥왕에게 계속 북진(北進)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진흥왕은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은 내가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알렸더니 고구려는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 서기 553년 신라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백제로부터 빼앗고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적(敵)이 되었다. 하지만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고 신라와 다시 혼인 나제동맹을 맺으며 "평화"를 선택했다. 진흥왕은 자신에게 시집 온 성왕의 딸을 소비(小妃)로 삼았다. 그러는 사이에 성왕은 군사력을 키우고 기회를 엿보며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서기 554년에 백제의 성왕은 대가야(大伽倻)와 연합하고 왜군(倭軍)까지 동원했다. 성왕은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려고 몸소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나갔다가 신라군에 붙잡혔다. 이번에는 백제가 먼저 나제동맹을 깨고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신라 장수가 붙잡힌 성왕을 죽였다. 그리고 성왕의 머리를 잘라서 신라 궁궐 관청 계단에 묻었다. 결국은 1백년 가까이 지속되던 나제동맹 관계가 깨지고 신라 왕실은 백제 왕실의 원수(怨讐)가 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삼국유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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