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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파 개경파 내분 반란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11. 1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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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지금의 개성)을 중심으로 김부식(金富軾)이 조정을 이끌던 개경파(開京派)와 고려의 계획 도시였던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승려 묘청(妙淸)이 이끌던 서경파(西京派)가 수도 이전 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서경(西京)은 고려시대의 지방 제도와 권력 구조 세워지고 도참 사상(圖讖思想)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초부터 서경 경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였던 평양이 황폐한 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여진족에게 노략질당하는 것을 걱정하여 918년(고려 태조 1년)에 평양에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태조 왕건의 사촌 동생인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郎) 열평(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참좌(參佐) 4, 5인을 두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국내 호족(豪族)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 기반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언제 서경으로 행정 구역이 승격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에 서경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는 것은 921년(고려 태조 4년) 10월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행정기구를 본격적으로 설치한 것은 922년이었다. 그러나 인종 때 서경을 기반으로 한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이후에 서경의 행정기구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1136년(고려 인종 14년) 유수, 감군(監軍), 분사어사대(分司御史臺)는 모두 그대로 두었지만 다른 관반(官班)은 모두 없앴다. 고려 인종 때 왕의 명칭을 황제라고 부르게 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운동이 서경천도운동이었다. 고려 중기 서경 출신의 신진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 외교 운동이고 묘청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후 김부식 등 개경의 문벌 귀족이 계속 세력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경 출신의 신진 관료인 정지상, 백수한, 묘청 등이 두각을 나타내어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서경천도운동은 고려 초창기에도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시도되기도 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인종 재위 때에 다시 떠올랐는데 이는 서경 출신의 신진 관료들이 개경의 문벌 귀족을 누르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서경 세력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과 금나라 정벌론 등의 주장도 내세웠다. 당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금나라에 대해서 문벌귀족들은 이자겸 이래로 신례(臣禮)를 취하는 등 실리 위주의 외교정책으로 대외적인 안정을 추구했는데 서경 세력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개경 문벌귀족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가졌다. 서경 천도파는 이러한 배경에서 수도 천도 운동과 함께 칭제건원, 금국정벌론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개경 문벌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로 끝이 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온건파와는 달리 묘청 등의 강경파는 무력으로 천도운동을 결행하려고 군사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토벌군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정지상 등까지도 처단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고려 개경파 그리고 서경파(西京派)가 서로 정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서로 대립한 사건인데 인종은 개경파 권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서경파 승려, 신료들에게 힘을 주고 별궁 대화궁(大華闕) 궁궐을 지어 건룡전(乾龍殿)에서 정무를 보기도 했지만 다 소용이 없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신하였던 여진이 크게 성장하면서 정반대로 고려가 신하의 나라가 된 처지의 상태에 놓였다. 고려는 이 상황에서 묘청이 나선 것이다.  그는 국왕이 서경으로 옮겨 가면 36개의 국가가 무릎을 꿇을 것이고 금이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반발심을 가진 개경파가 묘청을 죽이자고 인종에게 상소를 올렸고 묘청은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세운 뒤 국호를 위(爲)이라 하였다. 연호를 천개,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고 불렀다. 군주 자리는 비워 두었다. 고려 조정은 군사와 김부식을 보내서 서경에 대한 토벌령을 내렸다. 토벌군의 지휘관이 된 김부식은 개경에 남았던 서경파 인사인 정지상, 김안, 백수한을 묘청과 공모한 반역자로 몰아붙여서 처형하였으며 군사 세력을 나누어서 서경군의 외부 진출을 차단하는 작전을 세워 서경군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서경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조광 등이 묘청을 살해하고 몸통을 자른 머리통을 개경에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개경에서는 항복한 서경군 장교들을 감옥에 가두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조광은 항전을 지속했다. 김부식은 토벌군을 이끌고 서경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리고 서경의 성곽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한국고증세사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대위국)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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