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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난보쿠초 남북조 시대

세계의 역사-World History

by 느낌 . 2024. 1. 1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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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보쿠초 시대(南北朝 時代, 1336년 ~ 1392년)는 일본 역사의 중세 시대의 시대이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 겐코의 난(元弘の変), 겐무 신정(建武の新政)도 남북조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하지만 정확히는 1336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묘 천황을 왕위에 올리고 북조를 수립한 뒤에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고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요시노에 남조를 수립하여 일본 열도의 왕조는 2개로 나누어졌다. 1392년에 남조와 북조가 합쳐지기까지의 기간을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고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초기이다. 이 시대에 일본은 남조와 북조로 두 조정이 존재하였고 각자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난보쿠초 시대를 요시노초 시대(吉野朝時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14세기 일본에서 일왕 고후카쿠사(後深草)의 혈통인 지묘인통(持明院統)과 일본 천황 가메야마(亀山)의 혈통인 다이가쿠지통(大覺寺統)이 교토(京都)와 요시노(吉野)에 저마다 정권을 세워 대립하던 시기이다. 막부의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교토를 점령하여 지묘인통의 일왕 고묘(光明)를 왕위에 올려서 북조 정권을 세우고 다이가쿠지통의 일본 천황 고다이고(後醍醐)가 요시노로 탈출해서 남조 정권을 세운 1336년에 시작되어 메이토쿠(明徳)의 화약(和約)으로 남조와 북조가 통일된 1392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본 천황 고다이고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무너뜨리고 친정을 시작한 1333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가 끝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일본 열도 전국를 지배하는 시작의 과정에 해당하므로 넓게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포함되어 서술되기도 한다. 일본 왕실은 13세기 후반부터 지묘인통과 다이가쿠지통이 왕위 계승을 놓고 서로 대립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중재로 두 계통이 서로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 ‘양통질립(兩統迭立)’의 원칙에 합의했으나 일왕 고다이고는 지묘인통인 가즈히토 친왕(量仁親王)에게 양위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갈등이 일어났다. 이 문제로 막부와 대립하던 일본 천황은 고다이고는 1331년 교토를 탈출해 야마시로국(山城國)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가마쿠라 시대 말인 1246년 고사가 천황의 퇴위 이후의 천황 가문은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다이가쿠지 계통(大覚寺統)과 지묘인 계통(持明院統)로 분열되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여 다이가쿠지 계와 지묘인 계가 번갈아 가며 천황을 계승하는 것으로 양측을 종용했다. 1333년에는 다이가쿠지 계의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의 무사들에게 막부 타도의 윤지를 보내 도막 운동을 시도한다. 이에 합세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의 가세로 가마쿠라 막부를 멸하고 겐무 신정라고 불리는 고다이고 천황에 의한 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때문에 무사계급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구 막부 세력이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키자 다카우지는 천황의 칙서를 받지 않은 채 무단으로 난을 진압했고 친정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이에 불만이 있던 무사들도 가세하였다. 남조 측은 나와 나가토시, 유키 지카미쓰, 지구사 다다아키 이외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가 1338년까지 연이어 전쟁에서 사망하자 군사적으로 북조 측이 압도적 우위에 서게 된다. 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적장자 구스노키 마사쓰라, 마사토키 형제가 아시카가 측의 고 모로나오에게 토벌되어 요시노 행궁(吉野行宮)이 함락되었고 고무라카미 천황과 남조의 가신들은 아노(賀名生)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분위기가 북조로 커져갔다. 하지만 이후 정무를 맡고 있었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인 고 모로나오와의 마찰이 심화되었고 간노 연간 다다요시파와 반 다다요시파 간의 간노의 소란이 일어났는데 정쟁에서 패한 다다요시가 남조에 귀순하였고 다카우지의 자식이며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도 양아버지를 따라 규슈로 도망쳐서 북조와 싸우게 되었다. 규슈 지방에서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에 패한 기쿠치 가문 등의 남조 세력과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잇시키 노리우지와 니키 요시나가 등의 북조 세력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규슈의 남조 세력을 도모하기 위해서 고다이고 천황은 아들 가네나가 친왕을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봉해 파견하였다.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알선으로 천황가의 다이가쿠지 계와 지묘인 계가 황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고쿠가 영토(国衙領)를 다이가쿠지 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3종 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난보쿠초 시대의 사회는 이모작이 보급되는 등 농업생산력이 크게 높아졌다. 벼 품종이 다양해지고 관개시설도 정비되어 쌀 수확량이 많아지자 섬유를 만들기 위한 모시풀이나 기름을 짜기 위한 들깨 등 원료 작물의 재배도 늘었다. 수공업제품이나 식재료의 유통량도 늘었고 화폐의 사용도 활발해졌다. 난보쿠초 시대를 거치면서 공가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고 무가가 정치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공가는 경찰권, 민사재판권, 상업 과세권 등과 같은 전통적인 권리를 잃었고 일본 사회는 아시카가 장군가(足利將軍家)를 정점으로 한 무가 사회(武家社會)로 재편되었다. 아울러 전국에 흩어져 있던 영지를 관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매각, 교환을 거쳐서 점차 영지가 한 지역으로 일원화되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본인 작성, NAVER 두산백과,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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