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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 외척의 형성 영향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4. 5. 3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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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구려 영토와 한반도에서 위 아래로 발해(渤海)와 통일신라(統一新羅)가 공존하며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를 형성하여 이어갔다. 서기 900년 즈음의 신라 진성여왕 재위 기간에 신라 왕족 핏줄의 승려 출신의 궁예는 처음에는 송악(개성)에 도읍지로 정하고 "후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다. 궁예의 부하였던 무장 왕건은 그의 수하 장수들과 함께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고 궁예를 폐위시켰다. 철원에서 다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경이라고 하였다. 왕건은 태조가 되어 "고려"를 세웠다. 초창기 고려 정치 체제는 왕권이 약했고 마치 지방 귀족 중심의 호족 연합 체제였다. 왕건은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수 많은 지방 호족의 여식과 혼인하면서 혈연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중앙 집권 체제로서의 왕권 강화 정책에 큰 방해가 되었다. 지방 호족 뿐만 아니라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크게 기여를 했던 수 많은 신하들을 개국 공신(開國供臣)으로 봉하고 왕씨 성도 하사하며 왕실 인척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나로 세력을 모으는 국가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왕실의 외가(外家) 어머니 쪽의 친척인 외척(外戚)들은 엄청난 세력을 형성했고 주요 벼슬 요직을 장악했으며 부당하게 뇌물을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폐단이 발생했다. 그리고 외척들은 대를 이어서 자신의 가문의 자녀를 왕위에 올리고 왕비로 만들기 위해서 비뚤어진 야심과 야망을 실현시켰다. 고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서 943년에 장남인 혜종 "무"가 제2대 왕위에 올랐다. 945년에 왕건의 장인이자 혜종의 장인이었던 왕규는 왕실의 강력한 외척 가문의 수장이었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외손자를 혜종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리려고 살해를 목적으로 혜종의 침소에 자객을 보냈다. 당시 신하였던 최지몽이 왕에게 조언을 하여 혜종은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제3대 정종이 즉위하고 왕명으로 지시를 내려서 왕건의 사촌 동생인 왕식렴이 나섰고 왕규는 반란 죄목으로 귀양을 보내지고 살해를 당했다. 제7대 목종이 즉위하고 자신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자 헌정왕후와 왕건의 아들인 왕욱 사이에 태어난 대량원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대량원군은 제8대 현종으로 어려서 머리를 깍고 절에 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하며 숨어서 살아왔다. 대량원군은 왕위에 올랐고 무장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장악했다. 당시에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고려에 침공해서 전쟁이 일어났고 고려는 군사로 저항은 했지만 거란족이 고려군 군사 기지를 우회하여 한반도 개경으로 내려오자 현종은 왕실 식솔과 함께 신하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현종이 피난을 가던 길에 공주 지역의 관아에 머물렀는데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가 자신의 첫번째 딸을 현종의 시중을 들게 했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고 개경으로 돌아와서 김은부의 3명의 여식을 데려왔는데 모두 고려 왕실의 왕비가 되었다. 이들은 인주 이씨 집안 가문 출신으로 이후 100년간 왕실 외척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은부의 두번째 딸인 원성왕후가 제9대 덕종과 제10대 정종을 낳았고 김은부의 세번째 딸인 원혜왕후는 제11대 문종을 낳았다. 고려시대 왕 6대가 김은부와 이자연의 외손자들인데 이자연의 할아버지 소성백 이허겸은 김은부의 장인이었고 김은부와 이자연은 사돈지간 관계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도 왕실의 외척이 된 가문은 역사를 새로 쓰고 한 나라를 움직였다.

*본인 작성, 백지원의 완간 고려왕조실록 상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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