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백제 마한-신라 변한가야 병합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4. 10. 2. 10:37

본문

마한 가족
백제국(百濟國) 동아시아 교역 지도
가야국 변한 시절 소국(小國) 분포도

백제국의 마한 정벌 - 백제(百濟)는 소서노(召西奴)와 두 아들 온조(溫祚), 비류(沸流)가 고구려(高句麗)에서 한반도(韓半島)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운 나라이다. 기원전 18년에 위례성(지금의 서울 송파구 지역)에 도읍(수도)을 정하고 처음에는 10명의 가신들이 함께 세운 나라라는 뜻으로 십제(十濟)라고 불렀다. 마한(馬韓)은 고대시대 한민족(韓民族)의 54개 부족 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三韓)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마한(馬韓)은 기원전부터 6세기까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분포한 소국 연맹체로 진한, 변한과 더불어 원삼국시대를 구성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에 초기에 마한이 백제 보다 세력이 컸기에 백제가 마한에게 공물(貢物)을 바쳤고 도읍을 옮기거나 강역 확정 시에 마한에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과 포로를 마한 왕에게 보냈다. 그러다가 백제의 영역 확장과 국력의 성장으로 마한왕과의 갈등이 발생하는 등 관계 변화가 생겨났다. 서기 7년에는 온조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가졌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어서 마한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기 8년 10월에 온조왕이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마한을 공략하였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온조왕이 같은 해 7월에 마한 병합을 계획했다는 기사에서 준비 기간만 3개월이 넘게 걸렸다는데 원산성과 금현성은 이듬해 4월까지 완전히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조왕 대에 마한은 멸망했으나 이것은 고고학적 연대 및 중국 사서의 기록과 맞지 않으므로 실제로는 책계왕 시대에 벌어진 일을 축소해서 옮겨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왕 재위 34년째인 16년에 마한의 옛 장수였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병사 5,000명을 이끌고 이를 제압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한동안 마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온조왕 대 백제의 마한 관련 및 정복 기사들은 연대가 어긋나긴 했지만 일관성과 상호 연관성만큼은 뚜렷하여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사료임을 인정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추정했으나 여기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사실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일본서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침미다례가 남만(南蠻)이라 표현된 것은 당시 왜국(倭國)의 입장에서 남쪽이 한반도일 수 없으니 해당 기사가 본래 백제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주어를 왜국에서 백제로 바꿔서 신공 49년(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남쪽에 위치한 마한을 정복했다고 본 것이다. 백제의 영향력은 영산강 일대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 이를 근거로 문헌사학계에서는 5세기 경에 백제가 마한에 영향을 미치거나 간접 지배를 했다고 보고 있다. 직접 통치까지는 아니라도 전남 지역을 백제가 지배했다고 보기도 한다. 적어도 백제 동성왕 시기에 이르러야 지배력 강화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본다. 일부 문헌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벌했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것을 마한으로 해석하여 백제 성왕 대에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석한다. 현재 주류 문헌사학계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전남 지역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가 이뤄졌다고 보며 무령왕이 상차리(上哆唎), 하차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등 4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지역들을 섬진강 유역이나 가야 일부 지역으로 해석하여 간접 통치하에 있었던 영산강 일대와 달리 별개의 독립 세력으로 있다가 무령왕 대에 섬진강 유역을 합병했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록에 대한 불신을 근거로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을 부정할 수 만은 없다.
 
신라의 변한 가야 지역 병합 - 신라는 우리나라 삼국 시대의 삼국 가운데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지금의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이다. 수도를 경주로 하였고, 진흥왕 때에 가야를 병합하였으며 태종 무열왕 때에 백제를 문무왕 때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멸망하였다. 변한(弁韓)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의 하나이다. 진한(辰韓)과 마찬가지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辰)을 계승하였으며 소수의 중국 문헌에 의해 진한(辰韓)과 지리적으로 구별되었다. 지금의 전라도의 남쪽과 동쪽 및 경상도의 남쪽과 서쪽 지역으로 남해에 접하였고 서쪽은 마한 동쪽은 진한에 접해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에 의하면 12개국이 있었다고 전하며 나중에 구야국을 중심으로 가야로 발전했다고 추측된다. 삼국지 기록에 따르면 변진(변한)은 진한과 잡거(雜居)하였다고 한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면에서 진한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제사의 방식이였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서도 변한과 진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낙동강 하구 지역에서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삼한과 동예(東濊), 왜(倭), 한사군 등에 수출하였다. 또한 철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39년 봄 정월에 변한이 신라(혁거세 거서간 통치 기간)에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학자 신채호는 이는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가야(한국 한자: 加耶, 伽倻)는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 연맹체이다. 가락(駕洛) 또는 가라(加羅, 伽羅, 迦羅, 柯羅)라고도 부른다.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에 위치했던 변한의 금관가야(구야국)를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해 성립되었으며 학계에서는 금관가야가 이끈 가야 연맹을 "전기 가야 연맹"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후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약화되자 5세기 경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탄생하였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경쟁 구도 관계 속에서 압력을 받다가 532년 신라 법흥왕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하였고 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서 가야 연맹 전체가 멸망하게 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되고있다. 당초에 변한(弁韓)은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도 마한의 왕이 임명한 사람을 왕으로 세웠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하여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였고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었다.옛 변한 지역은 가야가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한동안 혼란을 겪었었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그때까지 변한의 일부였던 반파국이 가락국의 망명객을 받아들이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면서 가야의 주도권을 잡았고 반파국을 중심으로 소위 후기 가야 연맹을 형성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침범하고 패망시키고 백제를 압박했다. 중앙집권적국가체제를 정비한 대가야는 신라의 낙동강 수로와 옛 김해만 대신으로 백제의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고 섬진강 유역은 새로운 무역항이자 새로운 무역기반이 되었다. 전북에서는 남원, 진안, 임실, 장수 일대에 기문지방이 이루어지고 전남에서는 모루(牟婁, 광양), 사타(娑陀, 순천), 상, 하다리(여수) 등의 지역을 장악해 소위 섭라지방이 형성되어 대가야는 전성기였다. 494년에 가야 연맹은 22개국으로 경상남도를 최초로 장악했다. 512년(백제 무령왕 12년)에 대가야가 지배하고 있던 기문 지방과 상,하다리·사타(娑陀)·모루(牟婁) 등의 4현(縣)을 돌려받게 되고 가야는 15국으로 줄어들었다. 554년에 관산성 전투가 열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고 소가야와 사물국이 멸망하게 된다. 555년 신라는 창녕군에 완산주를 설치한 뒤 남은 가야 10국을 공격했다. 이후 557년부터 신라는 가야를 침략하여 공격하였고 559년경에 임례, 자타, 걸손, 졸마, 사이기, 산반하의 6개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 561년 2월에 신라는 아라 파사산을 공격하여 아라가야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성과 비석을 설치했다. 562년 1월에 남아있던 3국 중 다라국, 거열국이 신라에 멸망하였고 562년 9월 결국 마지막에는 대가야(大加倻) 마저 멸망시켜 신라 영토로 삼았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일본서기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