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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한민족 종교 그리고 신화

by 느낌 . 2021. 9. 1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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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 아시아 인도(印度 India)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에 의해서 창시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졌다. 불교(佛敎)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들어온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였다.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시절인 서기 372년에 승려 순도(順道)가 중국(中國)의 전진(前秦)이라는 나라에서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다. 백제(百濟)는 침류왕(枕流王) 재위 시절인 384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건너와서 백제에 불교를 전했다. 신라(新羅)는 법흥왕(法興王) 재위 시절인 서기 527년에 승려 이차돈(異次頓)이 순교(殉敎)하면서 비로소 신라에도 불교가 인정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불교의 역사가 깊은 만큼 우리나라에 불교는 고대시대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는 고대시대부터 이두문자를 썼다. 이러한 부분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라는 책에 잘 나와있다. 책에서는 말하기를 "한글"이 만들어진 시대가 아니였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한자"를 쓰면서 "이두 문자"(吏讀文字)를 쓰기 시작했다. "이두문자"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서 한국어(韓國語)를 적던 표기법(表記法)으로 쓰던 글자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의 음(音)을 그대로 쓰면서 한자(漢字)를 쓰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가정"이란 단어를 글로 나타내기 위해서 집 가(家)와 한자와 바를 정(正)을 2개의 "한자"를 이용해서 가정(家正)이라고 한자로 쓰면서 우리말 소리 음(音)을 한자로 글을 쓰는 방식이다. 그런데 당시 승려(스님)들은 글로서 이두문자를 책에 기록을 할때 불교식으로 불경(佛經)에 빗대어서 글을 쓰는 방식을 썼다. 이러한 부분은 고려시대 에 활동한 일연 스님이 쓴 역사책 "삼국유사"에 잘 나와 있고 역시 고려시대에 활동한 "김부식"(金富軾)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 "신라 본기" 등에도 잘 나와 있다. "이두문자"(吏讀文字)로 써오던 방식으로 그 시대의 왕의 이름, 벼슬 관직명을 글로 남겼던 것을 불교에 관련된 언어에 빗대어서 바꾸어서 표현하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이사금 유리왕(儒理王)의 이름을 세리(世利智)왕이라고도 부르는데 유리(儒理)는 처음에 쓰던 "이두문자"이다. 하지만 불가(佛家)에서 승려(스님)가 불경(佛經)에 나오는 불교식 표현을 가져와서 세리(世利) 왕이라고 고쳐서 기록하였다. 세(世)는 가계나 지위의 차례, 또는 왕조의 임금 순위를 나타내는 단위이고 리(利)는 "이롭게 하다"는 뜻이므로 정리해서 말하자면 "세리"(世利)는 "왕위를 이어서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한국 불교는 외국에서 전래된지 기원전 6세기경에 들어왔으니 16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 불교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우리가 쓰는 문자(文字)와 글 쓰는 방식에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석가모니불 부처(釋迦)의 형상(形象)을 나타낸 "불상"(佛像)의 조각과 불화(佛畵) 등의 그림을 그리는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여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佛敎)는 신(神)을 숭배(崇拜) 하여 삶의 목적을 찾는 종교(宗敎, religion)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인 목적 외에도 당시 나라의 중앙 정부에도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서 말한대로 그 시대의 왕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바꾸어서 표현하게 만들 정도라면 얼마나 그 당시에 "불교"가 조정(朝廷)의 정치 상황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장수왕(長壽王) 시절에 "바둑"을 잘 하던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百濟)로 보냈다. 그리고 백제의 근개루왕(蓋鹵王)과 바둑 놀이를 통해 사이좋게 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개루왕과 도림이 바둑을 두었는데 도림은 개루왕에게 궁전을 화려하게 짓고 성(城)을 쌓고 강가의 제방(堤防, levee)을 쌓아서 재난에 대비하고 왕의 무덤을 돌무더기로 보수해서 만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개루왕은 바둑으로 사이가 좋아진 도림의 꼬임의 말에 넘어가서 그대로 건축과 토목 공사를 했다. 그래서 국가의 창고는 텅비고 백제 백성들은 건축 토목 공사에 대거 동원되서 일하느라 개루왕을 향한 원망과 불만이 많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승려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갔고 고구려 장수왕은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慰禮城)을 함락했고 개루왕을 죽였다. 그리고 고구려 영토를 지금의 대전(大田) 이남까지 넓혔다.신라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었던 왕족 출신이자 불가에 들어가서 승려(스님)가 되었던 궁예(弓裔)가 부처 미륵 신앙(彌勒信仰)을 앞세워서 "후고구려'(後高句麗)라는 나라를 세웠고 고려(高麗) 인종(仁宗) 재위 시절에는 승려 묘청(妙淸)이 고려 지배층을 무력화 시키려고 서경(西京, 평양, 平壤)으로 도읍(都邑)을 옮기자고 천도(遷都)를 주장했다. 그리고 고려 조정에 대항해서 군사적으로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고려 말에는 신돈(辛旽)이라는 승려도 수도를 개경(송악, 개성)에서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천도(遷都)를 주장했다. 공민왕(恭愍王)의 신임(信任)을 받으면서 고려 조정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신하들이 집중적으로 견제를 해서 결국 "신돈"은 외지(外地)로 귀양(歸鄕)을 가서 죽었다. 1592년~1598년 동안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쟁 기간 중에는 승려 출신의 서산대사(西山大師,休靜)와 승려 사명당(惟政) 등이 승려로 구성된 의승군(義僧軍)을 이끌고 왜군(倭軍)과 싸웠다. 승려 출신의 한용운(韓龍雲)은 일제강점기에 1910년 당시의 모순(矛盾)과 부패(腐敗, putrefaction)한 한국 불교의 상황에 대해서 개혁 방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이라는 제목의 책을 백담사(百潭寺)하는 절에서 완성했고 이 책을 1913년 발간하면서 조선불교계에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이처럼 한국 역사에 승려(스님)들은 굵직한 행적을 남기며 큰 영향을 주었다.

*본인 작성. 조선상고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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