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종교 사상 이념 변화 평가

한민족 종교 그리고 신화

by 느낌 . 2021. 9. 22. 16:50

본문

 외국(外國)에서 오래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종교 이념은 불교(佛敎), 유교(儒敎), 도교(道敎), 천주교(Catholic, 天主敎)이다. 서남 아시아 인도(印度 India)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에 의해서 창시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졌다. 불교(佛敎)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들어온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였다.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시절인 서기 372년에 승려 순도(順道)가 중국(中國)의 전진(前秦)이라는 나라에서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다. 백제(百濟)는 침류왕(枕流王) 재위 시절인 384년에 중국의 동진(東晉)에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건너와서 백제에 불교를 전했다. 신라(新羅)는 법흥왕(法興王) 재위 시절인 서기 527년에 승려 이차돈(異次頓)이 순교(殉敎)하면서 비로소 신라에도 불교가 인정되었다. 유교(儒敎, Confucianism)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나라(唐)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는 서기 372년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태학(太學)이라는 기관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國學)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서기 285년 고이왕(古爾王) 52년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유교 경전인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일본(日本)에 전한 기록으로 보면은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것괴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서 서기 682년 신문왕 2년에서야 비로서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했고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설총(薛聰)은 이두문자(吏讀文字)를 만들어서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도교(道敎)는 우리나라에서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하는데 첫번째는 한국의 도교가 한국 고대시대의 민족 고유 신앙에 원류를 두고 있다는 관점으로 설명한 경우이고 두번째는 한국의 도교가 중국에서의 도교 이념으로 중국 민족의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황로사상(黃老思想)을 중심으로 정립된 후한(後漢, 25~220) 시대 말기의 기원후 2세기 전반기에 장각(張角, ?~184)이 개창한 태평도(太平道)와 장릉(張陵: 34~156)이 개창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도교의 원류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서로 대립되는 관점과는 달리 한국의 도교는 민족 고유 신앙 위에서 중국의 황로사상(黃老思想)과 신선사상(神仙思想)에다가 유교, 불교를 덧붙여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특정한 시대의 사상(思想)이나 문화(文化, culture)에 영향을 끼친것에 대해서도 그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가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전과 이후로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배경이 나누어지는데 여러번 명나라(明, 중국)에 사신으로 오갔던 이수광(李晬光)이 "M.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 등을 그의 쓴 책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소개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살았던 허균(許筠)도 베이징(北京)에서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祈禱文, prayer)인 "십이단"(十二端)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다.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 시절에 절두산(蠶頭峰)에서 국내의 많은 천주교도를 죽였다. 조선 사람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가 십년 동안의 옥살이 끝에 순교(殉敎)를 했고 그의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를 가자 그곳에서 가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시절에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렇듯이 외국에서 불교, 도교, 유교, 천주교가 국내로 전해지면서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시대가 바뀌면서 자기가 믿는 사상과 이념에 따라서 그것에 매달려서 자신이 믿는 종교 사상 이념과 다른 사상과 이념은 배척하고 삭제하고 없애기를 반복했다.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김부식"은 적극적으로 유교 이념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었는데 당시에 역사서 "삼국사기"를 쓰면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글쓰기 기법으로 중국과의 사대주의(事大主義, flunkeyism)를 중요시했고 우리 역사의 전통을 쓰지 않거나 삭제하는 등의 행동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였으며 다만 당시 중국 역사서에 나와있는 일부의 우리의 전통 문화 역사는 마지못해 참고해서 삼국사기에 적었던 사람이었다. 고려시대가 불교를 숭상하던 시대였지만 김부식이 이런 방식으로 "삼국사기"를 저술할 정도라면은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본격적으로 숭배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얼마나 많은 우리 과거의 역사 문화가 없어졌겠는가. 천주교는 처음에 조선 말기에 실학 사상(實學)을 중요시 하던 지배층들이 중국에서 천주학 관련 저서를 들여와서 공부하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조선 팔도에 "척화비"(斥和碑) 비석까지 세워가면서 서양 문물이 조선에 들어오는것을 막았던 고종(高宗) 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더욱더 천주교 사상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보통 그 종교 이념이란 것은 일종의 사람과 사람 사이를 하나의 단체로 묶어주어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어내는데 그 의미가 있다.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때에도 불교라는 종교 사상이 얼마나 우리나라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는가. 물질적인 문화를 비롯해서 정신적인 문화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던 종교였기에 당시 지배층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조선 팔도에 "절"(사찰)과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위업(偉業)을 높이 과시하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 모았다. 한국 유교의 계파(系派)로서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 선생과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이념(理念)도 빼놓을 수 없다. 퇴계 선생은 사(士, 선비)란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여 그 이념을 자기화하고 실천하는 선비였으며 사림이란 비의 복수 개념이기에 선비로서 수기(修己)하고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어 치인(治人)하는 것을 정로(正路)로서 삼았다. 15세기에는 저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집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와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하여 주자학(朱子學) 이론체계를 정립했다. 율곡 선생은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하여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理氣之妙) 사상을 강조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한국 성리학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가 조선 성리학자 "강항"(姜沆)의 도움을 받아서 저서 "사서오경왜훈"(倭訓)을 편찬했다. 그리고 일본 성리학의 시초가 되었다. 신불습합(神佛習合, 불교와 신토의 혼합)처럼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에 일본에서는 신토(神道, 일본 고유의 민족 종교)를 이기론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하는 등 성리학의 일본 자신들만의 성리학 문화가 이루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조선으로 건너와서 유교의 "성리학"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발전시켰고 그 한국 성리학이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간에 종교 이념은 그 나라의 문화에 영향을 주고 때로는 그 뜻이 잘못 전달되어 사회의 혼란을 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람들의 민심은 변화시킨다. 사회 통합(社會統合, social integration)이란것도 그 하나의 구심점(求心點)이라는것이 필요로 하는데 처음에는 그 뜻이 다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구심점이라는것도 하나도 아니고 여러개로 서로 파벌(派閥)을 짓고 계파(系派)로 나누어진다면 그 뜻이 전체에게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뜻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상과 이념의 목적인 종교는 사회통합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맨 처음에 불교가 전래되었을때는 민간 신앙 외에는 별다른 종교가 없었기에 "불교"라는 종교 하나로 백성들을 정신 사상을 묶어서 민심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여러 종교가 셀 수 없이 많이 생겨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간에 그 관계도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믿는 종교 사상 이념이 큰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본인 작성, 조선상고사,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