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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 여러 갈래 과정 정리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4. 1. 2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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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용담산성"이고 그 아래의 평지성이 "관지성지"이다. 사진을 찍은 지점이 "동단산성"과 동단산 평지성이 있는 지점이다. 이 성곽들은 모두 부여의 초기 도읍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3세기경 부여국의 세력권(강역) 추정 지도

북부여 (夫餘, 北夫餘) - 부여는 "북부여"라고도 부른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 측의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 측의 기록인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에서는 부여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쪽 탁리국(橐離國)에서부터 이주해서 건국하였으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북류 송화강과 눈강(嫩江)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肇源)의 백금보(白今寶) 문화나 대안(大安)의 한서(漢書) 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사실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단정지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3세기 무렵의 부여는 서쪽으로 오환과 선비와 가까이 있고 동쪽으로는 읍루와 닿았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고 서남쪽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가까이 있다. 그 중심은 부여성이고 사방 2천리에 달하는 평야지대를 영역으로 삼았다.
 
두막루 (豆莫婁) - 두막루가 중국 사서에 486년에 등장하는 것에 비해 부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494년(문자명왕 3년)에 “부여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부여의 멸망 이전에 두막루의 존재로 인해 두막루의 계통에 대해서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의 고대국가로 인정하는 학설과 부여와 관련이 없는 국가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졸본 부여 (卒本夫餘)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는 주몽설화에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자 그곳의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비류 설화에는 주몽이 졸본 부여 지역에 오게 되자 졸본 사람 연타발의 여식으로 소서노와 결혼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졸본지역에는 고주몽 집단이 남하하기 이전에 정착한 부여계 이주민이 이미 일찍부터 소국(小國)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부여 (東夫餘) - 동부여는 해부루(解夫婁)가 건국한 부여족 국가이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는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으나 도중에 반기를 들었기에 고구려 무휼(대무신왕)이 정벌을 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 등에는 동부여는 해부루가 왕조를 창업하였고 금와(金蛙)와 대소(帶素)가 뒤를 이어 재위하였다.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천신(天神)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하여 동쪽 지역으로 국가를 옮길 것을 주장하자 해부루는 도읍지를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이름지었다. 동부여의 중심지 추정은 다소 차이는 있으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함경도 일대에 있었던 동예(東濊)와 3세기 전반까지 부여국은 지금의 길림시(吉林市)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침략으로 공격을 받아서 지배층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다시 길림 지역을 되찾아서 돌아갔는데 일부가 남아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장악하자 북부여와 단절된 동부여는 스스로 살아가다가 410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병합되고 이에 동부여라는 명칭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갈사국 (曷思國) - 부여왕 대소(帶素)의 아우가 남하하여 갈사수(曷思水) 지역에 세운 작은 나라이다. "삼국사기"에는 갈사국왕은 부여 금와왕의 막내아들로 그의 형인 대소가 피살되자 장차 나라가 망할 것으로 생각하고 종자 100여명과 함께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러 마침 사냥을 나온 해두국왕(海頭國王)을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갈사국왕의 손녀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둘째 왕비가 되고 왕자 호동(好童)을 낳는 등 갈사국은 고구려와 관계를 맺으면서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서기 68년 손자 도두(都頭) 때에 이르러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남부여(南夫餘) - 백제는 538년(성왕 16년)에 수도를 웅진(熊津)에서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기고 백제의 중흥을 이루기 위해서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바꾸었다. 백제 성왕은 이 때부터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함과 아울러 영토릏 확장하기 위해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부여군은 옛 백제의 왕도이니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백제 성왕 16년 무오(戊午) 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한다"는기록이 있다. "삼국사(三國史)"에는 백제왕의 성이 부씨(扶氏)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고전기(古典記)"에는 백제 제26대 성왕 시절에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여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본인 작성, Dau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국), 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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