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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 성장 멸망 과정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22. 8. 1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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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인 서기 698년에 건국되었다. 서기 696년에 중국 요서(遼東) 지방의 영주(營州)에서 일어난 거란족의 반란이 발해 건국의 계기가 되었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에 있는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도시로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 거란족, 해족(奚族), 말갈족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서기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 도독의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배하는것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유주(幽州)까지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피해를 주었지만 진압되었다. 영주에 함께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이들과 함께 했는데 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무렵에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 이 때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 집단도 동참했다. 두 집단은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으로 이동했는데 당나라에서는 처음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에게는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이라는 벼슬을 주고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했고 당나라는 군대를 보냈다. 당시에 당나라 장수는 이해고(李楷固)였는데 그는 먼저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같은 시기에 걸걸중상도 죽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 세력과 걸걸중상 세력을 통합하였고 대조영 집단은 당나라 군대와 싸웠다. 대조영은 세력을 모아서 동모산(東牟山)에 나라를 세웠다. 이곳은 말갈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지역이었기에 "발해가 읍루의 옛 땅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족 구성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었다. 영주를 탈출할 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독립적으로 망명자를 이끌었는데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이끌었고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이끌었다. 발해를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합쳐져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지배 세력은 고구려 유민이었고 발해인의 성씨 가운데 고(高)씨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국호를 진국(振國)이라 했다. 진국(震國)이란 기록도 있다. 그러나 震國은 잘못 기록된 이름으로 보여진다. 아마도 이전에 당나라 황제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이라는 벼슬을 주려고 했을때 그 벼슬이 잘못 전래된듯 보여진다. 대조영이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을 받은 뒤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서는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발해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전에는 말갈 집단으로 낮추어 보았던 것이다. 대조영은 순수한 고구려인도 순수한 말갈인도 아니었다. 대조영을 고구려에서도 별종(別種)으로 바라보며 이민족의 자손이라고 여겨진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대조영의 집안은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의 말갈족 사람으로 일찍이 고구려에 귀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 장수로 살다가 고구려의 지체 높은 가문으로 성장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건국 당시에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발해의 백성으로 삼을 수 있었다. 고왕(高王) 대조영(?∼719)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서 당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동돌궐(東突厥)에 사신을 보냈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냈다.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등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당시에 바다 건너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고 교류했다. 713년에 당나라 현종이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고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는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책봉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로부터 발해는 거의 매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당시 북방에서는 거란족의 세력이 커졌다. 거란은 발해를 공격했다. 발해는 거란의 공격으로 926년에 멸망했다. 백두산 화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하다. 발해의 내부 분열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주민 구성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나누어져 있었고 지방의 수령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언제든지 분해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발해의 국가 존속 기간은 228년이다. 고려로 가지 않은 대부분의 발해인들은 만주 지역에 남았다. 고청명 등 발해 유민들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군사가 되어 발해인 부대를 조직해서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고려군과 싸웠다. 여진족인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나라를 공격할 때 요나라의 황제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서 아골타를 공격을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보냈다. 그리고 여요전쟁 도중에 요나라가 고려를 침략하고 공격하여 끌고 간 발해 유민도 많았다. 수 많은 발해인들은 금나라 중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민족에 섞여서 동화되었다고 보여진다. 고려에 직접 귀순하거나 한민족 국가의 백성이 되지 못한 수 많은 발해인들은 중국, 러시아 등에 남아서 소수민족이 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발해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이민족 중국 세력에 진압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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