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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후고구려 전쟁 기록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23. 2. 1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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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고구려 태조 궁예
후삼국시대 지도

궁예(弓裔, 857?년~918년, 재위 901년~918년)는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고 진성여왕과 남매지간(男妹之間)이라는 설이 있다. 서기 880년 즈음 신라 제51대 진성왕(眞聖王) 재위 시절 5년 겨울 10월에 북원(北原, 강원도 원주)의 도적 수령 양길(梁吉)이 그의 부하였던 궁예를 보내서 기마병 백여 명을 이끌고 북원(北原)의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 지역 관내의 주천(酒泉, 강원도 영월) 등 10여 군현(郡縣)을 기습하게 하였다. 진성왕 8년 겨울 10월에 궁예가 북원(北原)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에 들어왔다.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니 궁예는 스스로를 장군(將軍)이라고 불렀다. 진성왕 9년 가을 8월에 궁예가 저족군(猪足郡, 강원도 인제)과 성천군(成川郡, 평안도 동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빼앗고 또 한주(漢州, 한강 하류 지역) 관내의 부약군(夫若郡, 강원도 인제군 남면)과 철원군(鐵圓郡, 강원도 철원) 등 10여 군현(郡縣)을 격파하였다. 서기 890년 즈음 제52대 효공왕(孝共王) 2년 가을 7월에 궁예는 패수(浿水, 평안도 대동강) 서쪽 방면에 이르러서 한산주(漢山州, 북한 지역의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일부 지역)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군(松岳郡, 황해도 개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궁예는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이름 지었다. 후고구려와 후백제(後百濟)는 이전에 건국한 나라 이름과 똑같이 이름을 지은 이유가 과거에 건국 이념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건국 시기를 구분하고 형성을 구별하기 위해서 후(後)를 앞에 붙인 것이다. 앞서 서기 870년 즈음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3년 봄 정월에 후일에 고려(高麗)를 건국한 왕건(王建)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효공왕 3년 가을 7월에 북원의 도적 양길은 궁예가 자기를 배신할 것을 두려워하여 국원 등 10여 성주(城主)들과 함께 궁예를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비뇌성(非惱城, 경기도 안성 죽주산성) 아래까지 진군하였으나 궁예의 군사에게 양길의 병력이 궤멸(潰滅)되어 도망쳤다. 효공왕 4년 겨울 10월에 국원(國原, 충청도 충주), 청주(淸州, 충청도 청주), 괴양(槐壤, 충청도 괴산)의 도적 수령 청길과 신훤 등이 성(城)을 궁예에게 가져다 바치고 항복하였다. 효공왕 7년에 궁예가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철원과 부양(斧壤, 황해도 청단군 지역)에 와서 산수(山水)를 둘러보았다. 효공왕 8년에 궁예가 백관(百官) 을 두니 신라(新羅)의 제도를 따랐다. 제정된 관호(官號)는 비록 신라(新羅)의 제도에 기원을 두고 따랐으나 전각(澱閣, 궁궐)의 이름은 많이 달랐다.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무태 원년 패수(평안도 대동강) 서쪽 방면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효공왕 가을 7월에 궁예가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겼다. 효공왕 9년 8월에 궁예가 군사 병력을 움직여서 신라의 변방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니 죽령(竹嶺, 경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도 단양군 사이의 고개) 동북 지역까지 이르렀다. 효공왕 13년 여름 6월에 궁예가 왕건과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바다로 병선(兵船)을 이끌게 하니 진도군(珍島郡, 전라도 진도)을 군사로 점령하고 또 고이도성(皐夷島城, 전라도 영광 바닷가에 있던 성)을 격파하였다. 효공왕 14년 견훤이 몸소 보병과 기마병 3천명을 이끌고 나주성(羅州城, 전라도 나주)을 포위하여 10일 지나도록 그 경계를 풀지를 않았는데 궁예가 왕건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출동시켜 견훤의 군대를 습격하니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서기 910년 즈음 제53대 신덕왕 3년 봄 3월에 궁예가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로 고쳐 원년으로 하였다. 서기 910년 즈음 제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여름 6월에 궁예의 부하들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끌어내렸다. 궁예는 비참하게 쫒겨나서 도망치다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궁예가 건국한 후고구려(後高句麗)는 멸망을 하게 되었고 궁예는 고구려부흥운동으로 자신이 세운 나라를 왕건에게 빼앗겼다. 왕건이 태조(太祖)가 되어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에 고려(高麗)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태조 왕건은 연호를 정하여 원년으로 삼았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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