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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독립운동 평가

일제강점기-한민족 독립운동사

by 느낌 . 2023. 6. 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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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원 단체 사진
증국 영토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망명 이동 지도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상대로 칠십 나이 평생의 세월을 몸 바쳐 살아온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김구(金九) 선생의 본명은 김창수(金昌洙)이다. 이후에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구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김구 선생은 먼 훗날에 자신의 자손에 보이라고 자신이 겪은 일생 일대의 사건들을 기록한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라는 제목의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불교식 이름인 법명은 원종(圓宗)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1893년에 동학(東學)에 들어가서 접주(接主)가 되었다.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다가 일본군에게 쫓겨서 1895년에 중국 만주 지역으로 몸을 피했고 김이언(金利彦)이 이끄는 의병단원이 되었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鴟河浦)에서 머물다가 우연히 조선인으로 의복을 입고 주막에 머물던 일본 군인 쓰치다(土田讓亮)를 보게 되었고 당시에 우리의 국모(國母)였던 명성황후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을 떠올리며 홀연단신으로 대적하여 쓰치다를 죽였다. 김구는 고향에서 지내다가 쓰치다를 죽인 죄명으로 황해도 해주(海州) 감영으로 잡혀갔다.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하고 인천 감옥으로 옮겨졌고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당시 조선 국왕이었던 고종(高宗)의 특별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다. 김구 선생은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1898년에 인천 감옥을 몰래 탈옥하였고 혼자서 도망을 다니다가 충청도 공주에 있는 마곡사(麻谷寺)라는 절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어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와서 한동안 스님 행세를 하다가 다시 민간인이 되어 1903년에는 야소교(耶蘇敎,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9년에 황해도 안악에서 학교를 여러곳 세우고 양산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했고 1911년에는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시 감옥에 갇혀서 15년 복역 기간을 선고받았다. 그가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그를 뒷바라지 해오던 부모와 자식을 키우던 아내의 생활 여건도 하루 하루가 힘겹고 수고스러웠다. 김구 선생은 감옥 생활을 지내면서 여러 조선인 동지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선생은 무지했던 서로의 머리를 깨우치고 서로를 아끼고 도와주며 감옥 안에서 높은 신망을 얻었다. 일본에서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처음 감옥 수감 형량 기간이 차츰 수년씩 줄어들었고 1915년에 예정보다 일찍 감옥에서 나왔다. 출소를 하고 난 이후에 고향인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와서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에서 관리 감독을 하면서 학교에서 일하고 세월을 보냈다.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가정을 지켜나가는 일이 쉽지가 않아서 어둡고 불행했다. 일찍이 가정을 이루었으나 아내가 몸을 다쳐서 먼저 죽고 어린 자식도 일찍 병에 걸려서 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여러번 겪었다. 자기 자신을 낳아서 키운 부모를 고생시키고 가족 친척 지인들은 줄지어 세상을 떠났다. 충청도 천안(天安) 지역의 시골 장터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김구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 내무총장, 국무령(國務領) 자리에 올랐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의 차이와 대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에서 조직과 여론은 분열되고 여러 계파(系派)와 파벌(派閥)로 나누어졌다. 그러자 하나의 정신으로서 통일된 임시정부로 재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가 않았다. 김구 선생은 1928년에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총과 칼로 일제와 맞서기 위해서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김구 선생의 명성을 듣고 일제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찾아온 이봉창(李奉昌)에게 1932년에 일본에서 천황 사쿠라다몬(櫻田門)을 암살하게 지시했고 윤봉길(尹奉吉)에게는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지도록 지시했다. 여기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미국(United State)을 비롯한 하와이 섬(Hawaii), 멕시코(Mexico), 쿠바(Cuba) 등의 해외(海外)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이 모금해서 보낸 자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晚) 등의  외교 활동도 한 몫을 했다. 김구 선생은 여러 거사를 진행하면서 그를 향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거액의 현상수배범으로 낙인이 찍혀서 이곳 저곳으로 도망을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33년에 중국 난징(南京)에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를 만나서 조선인 무관학교를 설치하자는 지원 약속과 일제 세력에 공동으로 항일운동을 하자고 결의를 하였다. 1935년에는 임시정부에서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1940년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갈 때에 역할을 했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옮겨서 다닐적에 조직원들은 늘 항상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김구 선생은 1944년 4월에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애써 키운 한국광복군이 조선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막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미군연합군이 일본 히로시마 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공격을 받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항복(降伏)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1945년에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光復, 빼앗긴 영토 그리고 주권을 다시 되찾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임시정부 단원들은 정식 정부 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임시정부가 미군정(美軍政)에게 한국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은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러시아 모스크바 지역에서 결정한 3상 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신탁 통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합(UN)의 위임을 받은 나라가 일정한 기간 동안에 스스로 자신들의 지역을 다스리지 않는 것을 제3자가 대신해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탁통치의 목적은 자치 능력이 없어서 정치적 혼란이 우려되는 지역을 잠정적으로 위임 통치를 함으로써 안정적인 정치 질서의 수립에 기여하는 것이다. 김구 선생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냈고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南韓)에만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이루기 위해서 북한(北韓)으로 가서 사회주의자 김일성(金日成) 등 좌익 진영 사람들을 만나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통일 정부 수립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구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지인을 만나고 과거에 머물렀던 지역을 찾아가서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그를 향한 환영식은 성대하였다. 김구 선생은 경교장(京橋莊)에서 그를 찾아온 군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구 선생은 나에게 하나님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은 나의 소원은 대한 독립이고 그 다음의 소원은 우리나라의 독립이고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인지 셋번째 물음에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 이념, 정치, 민족, 혈통, 파벌 등을 구분하지 않고 세계 인류 모두가 문화적으로 화합하며 지내기를 원했다. 그리고 독재 형태의 정치 체제를 원하지 않고 공산당이 이끄는 소련식 민주주의(소비에트 연방 정치 체제)를 반대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최고의 문화 강국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 가기를 원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교육으로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이끌어 만들어가기를 원했다.
 
*본인 작성, NAVER 두산백과, 백범일지(白凡逸志)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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