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간회新幹會신민회新民會

일제강점기-한민족 독립운동사

by 느낌 . 2023. 7. 12. 06:27

본문

신간회 회원 단체 사진
신민회 회원 단체 사진

신간회(新幹會) - 1920년대∼1930년대에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 성격과 사회주의 운동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단체들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적인 세력 등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유지되어왔던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 가까이 가입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1927년 2월에 생겨난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은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만들었다. 안재홍(安在鴻), 이상재(李商在), 백관수(白寬洙), 신채호(申采浩), 신석우(申錫雨), 유억겸(兪億兼), 권동진(權東鎭) 등의 34명이 일을 진행시켰다. 정강정책(政綱政策)은 조선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으로 해방을 실현하고 우리 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며 모든 기회주의 행동을 거부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직책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하여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을 가졌다. 신간회는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 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 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서 전국에 지회(支會)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이 가입을 하였다. 일본에서도 조직이 되었고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인물은 대부분이 가입을 하였고 모임 활동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신간회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고 대규모의 집회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29년 11월에 전라도 광주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에 대해서 항의를 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했다가 조병옥(趙炳玉), 이관용(李灌鎔), 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 4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는 조직이 약해졌다. 그리고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조직의 해산운동이 벌어졌다. 1931년 5월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만에 해산되었다. 일제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진행 상황 파악과 계보 활동을 예의 추적했고 구금하기 위해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신간회를 허가해 주었다. 이후에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民興會)의 명제세(明濟世)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1929년 7월 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영에서 회칙 개정을 요구하며 대거 참여하였다.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전라도 광주, 목포 등의 지회가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하고 파급시키기 위해서 전라도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열고 그 부당성을 규탄하기로 하였다. 일본 경찰은 민중대회 허가하지 않았고 조병옥, 김무삼(金茂森), 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하고 구속하였다. 김병로는 감옥에 나와서 신간회 재건 운동에 힘썼다.
 
신민회(新民會) - 1907년을 이전과 이후로 일제가 보안법, 신문지법 등을 제정하고 반일 계몽 운동을 탄압했고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서 신민회를 조직했다.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1896년도에 결성되서 2년 동안 활동하다가 해산한 독립협회(獨立協會) 소속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張志淵),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李鍾浩), 이승훈(李昇薰) 그리고 안태국(安泰國),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등이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정하자며 입헌군주제를 거부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서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다. 비밀결사 단체였기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회원을 받아들였고 조직은 총본부 산하에 감독부, 총감소(總監所), 군감소(郡監所), 반(班)의 종적인 형태로 구성했다. 그리고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를 알지 못하게 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이 가입했는데 서북 지방의 그리스도교인이 많았고 신흥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있었다. 조직 활동은 첫번째로 교육구국운동으로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는 수십 개에서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민회의 학교설립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두번째로 계몽강연 및 서적, 잡지 출판운동, 계몽강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애국주의, 국권회복, 민권사상, 구습타파, 자발적 의무교육실시, 민족단합의식 등을 인식시켰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이용했고 최남선을 중심으로 1908년 11월에 창간한 잡지 "소년"도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또한 출판물 보급과 사업연락을 위해서는 평양, 서울, 대구에 각각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합법적인 활동을 했다. 민족문화와 국사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외곽단체로서 출판사업을 이끌었다. 세번째로 민족산업진흥운동, 민족산업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실업장려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평양 마산동에 자기제조주식회사(瓷器製造株式會社)를 세웠고 협성동사(協成同事), 상무동사(商務同事), 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사리원 지역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네번째로 독립군 양성운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으며 의병운동의 현대화를 위해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1911년에 중국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해 단체 이주를 시작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이전과 이후로 일제가 한일합병 작업을 끝내면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안창호, 이갑, 이동휘, 신채호, 조성환(曺成煥) 등은 1909년에 미국과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중국 서북간도로 망명했으며 이회영, 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와 회원 일부가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선언이 되고 나서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논의하는 회의가 국내외적으로 열렸다.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김구(金九) 등의 국내에 있던 신민회 회원들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국외의 망명자들인 안창호, 신채호, 이갑 등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다. 국내와 국외에서 열린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의 의견으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다.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을 계획하고 무관 양성을 위해서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지원할 자금을 조달하는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밝혀졌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해산되었다. 국권을 빼앗기면서 중국 만주 지역에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전쟁을 하자는 방향으로 진행 목적이 바뀌게 되었고 중국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 전쟁이 활발해졌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는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신민회의 창립 과정에 다섯 개의 비공식 애국집단 세력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신문사의 일간지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고 두번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다. 세번째는 한반도 서북 지방과 서울 등지의 신흥 시민 세력이고 네번째는 무관 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미주(미국)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 세력이다. 안창호, 이강, 임준기(林俊基) 등은 1906년 말부터∼1907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안창호가 생각해 낸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 장정"을 초안을 작성하였다. 안창호는 1907년 1월 20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이후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자고 제안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단체를 만들지 못하다가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면서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안창호는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양기탁을 중심으로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1910년에는 회원 수가 800명에 가까웠다. 自新)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신민회취지서"에서 민습의 완고에 대해서는 "신사상"이 도입되야 하며 민간 풍습으로 어리석은 행동에 "신교육"을 함으로서 고쳐져야 하고 열심의 냉각에 대해서는 "신제창"으로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원기의 소침에 대해서는 "신배양"이 되어야하며 도덕의 타락에 대해서는 "신윤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의 쇠퇴에 대해서는 "신학술"로 논의가 되어야하며 실업의 부진에 대해서는 "신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의 부패에 대해서는 ‘신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로서 신민회를 육성하고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애국적인 동포를 하나로 단합시키며 각 구역에 연락 기관을 두고 나누어 세워서 연락과 교통을 긴밀히 하자고 주장했다. 신민회는 나 자신이 "통일 연합"에 소속되어 비폭력 또는 무력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히 참여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문명국을 수립하는데 힘을 모으자고 주장했다.
 
*본인 작성, NAVER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