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위화도회군 그리고 개경 전투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4. 1. 2. 05:48

본문

조선 태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 이동 지도
고려 수도 개경 전투
고려 수도 개경 전투 지도

 위화도(威化島)는 의주 지역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중국)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고려의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알렸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고 요동정벌 전쟁으로 이어졌다. 요동정벌이 단행되었을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일은 옳지 않고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일본 해적)가 창궐할 것이며 매우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가지 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고려 우왕(禑王)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그리고 고려에서 국토(國土) 8도(팔도강산)의 군사를 불려들여서 모으고 세자와 여러 왕비(王妃)들을 한양산성(漢陽山城)으로 피신시키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했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西海道)로 가서 요동정벌을 지휘하였다. 같은 해의 4월에는 우왕이 봉주(鳳州) 지역에 있으면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서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서경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양광도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 안경(安慶), 왕빈(王賓) 등을 소속시켰다.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 삼아서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안주도상원수 지용기(池勇奇), 안주도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 박영충(朴永忠), 이화(李和), 이두란(李豆蘭), 김상(金賞), 윤사덕(尹師德), 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 이을진(李乙珍), 김천장(金天莊) 등을 소속시켜 좌군(左軍)과 우군(友軍)을 편성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군와 우군 38830명과 겸군(傔軍) 11600명 그리고 말 21682필이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서경(西京)에 머물면서 전투를 지휘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은 10만 대군을 내세우면서 서경을 출발해 다음 달에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생겨났고 큰 비가 내려서 압록강을 건너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 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서경(西京, 平壤, 평양)에서 송도(松都, 개경, 開京, 開城, 개성)로 돌아갔고 개경(開京)으로 돌아온 이성계 등은 개경 전투에서 최영의 군대와 공성전을 벌이고 개경 안 시가지에서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이성계의 군대에 반격을 해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를 물리치고 조민수의 본부대까지 막아냈으나 전력의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군(右軍)은 개경 도성의 동쪽의 숭인문 밖에 좌군(左軍)은 개경 서쪽의 선의문 밖에 주둔했다. 좌군과 우군은 이 나성(羅城)을 돌파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최영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좌군과 우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이성계는 좌군과 협공했고 좌군을 이끌던 조민수는 개경 도성의 안쪽으로 전진했다는 기록이 있다. 개경 서쪽의 선의문을 맡았던 좌군은 개경 성 안의 진입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공격의 늦춤으로서 숭인문의 병력이 상황이 어려운 선의문 방면으로 보충되었고 이를 노린 이성계가 방어가 약해진 숭인문을 공략했다. 좌군을 이끌고 선의문을 돌파했던 조민수는 영의서교(永義署橋)까지 진군했는데 최영에게 다시 밀리게 되었다. 영의서교는 조민수가 서쪽 선의문을 통해 진입했던 점으로 볼때 선의문과 남산 사이에 있었던 교각으로 보인다. 당시 개경의 수비군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징발하여 개경으로 집결시키고 수레를 가져와서 모아서 시가지 거리 입구를 막았다. 당시 조민수는 검은 색의 큰 깃발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있었다. 최영의 군대는 흑대기를 든 조민수의 부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성계의 군대가 최영의 군대에 쫓겨가는 조민수의 흑대기 대신에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진군하자 당시 개경 안의 남산에 있던 최영의 휘하인 안소(安沼)의 정예군이 반란군을 보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성계는 그러면서 남산을 점령했는데 개경 도성 내의 공간은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있었고 남산(南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선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남산은 개경의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남산이 반란군에 점령되면서 개경 전투는 반란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최영은 이성계, 조민수 군대에게 체포되었다.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유배를 보내고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무위키, 위키백과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