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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쿠데타 군사반란 과정

근현대시대 대한민국

by 느낌 . 2023. 12. 2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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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군사 반란 서울 수도권 작전 상황도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1940년대에 일제로부터 8.15 해방을 맞이하였고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이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켰다. 6.25 한국전쟁을 거쳤고 국토는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국내의 정치 상황은 여전히 불안했다. 북한이 언제 또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사회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국민들은 생업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며 불안에 떨었다. 이러한 시국에 남한 대한민국에서는 똑똑한 군인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헌법 보다는 막강한 군사력에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이 중앙 권력을 손 쉽게 손아귀에 넣고서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권이 시민들의 4.19 혁명으로 물러났고 연이어 국가 원수들이 수장 자리에 올랐으나 별 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 했다. 1960년의 4월 27일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데모는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박정희 육군 소장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이다. 이 쿠데타로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였다. 당시 국군에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었고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군부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었다. 박정희 등은 이승만 정부 때 쿠데타를 하려 했으나 4.19 시민 혁명으로 중단이 되었다가 다시 진행했다. 쿠데타 세력은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하여 대구, 부산 등의 지방 지역 방송국 등의 주요 언론 방송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그리고 주한 미군과 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켰다.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며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와서 장악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군정을 실시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에 서울 어느 식당에서 벌어진 식사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함께 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으로 쏜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1979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전두환과 노태우가 불안한 시국을 이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을 명분으로 삼아서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김재규와 같은 편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란군은 무장한 헌병대 병력으로 한남동 공관촌을 점거하고 허삼수 보안사령부 대령과 함께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진입해서 정승화에 대한 강제연행을 시도하면서 계엄사령관의 상관이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동시에 받아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근처에 구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에 위치한 장세동 보병 대령이 단장이던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하였다. 공관에 진입한 반란군은 정승화에게 강제연행을 하면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대통령의 승인 여부를 전화로 확인하려는 정승화 측 수행원에게 총격을 가하고 공관 내부를 제압한 뒤에 외부에서 대기하던 병력도 공관 창문을 깨고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정승화 납치와 동시에 정승화 체포수사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던 처음 계획이 대통령의 재가 거부로 인해서 실패했다. 결국은 정승화를 강제로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다. 이 사건 이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고문을 당한 이후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함께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 갔던 사람은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 문홍구 작전 본부장이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을 막으려고 했지만 초반 정보의 혼선과 부족으로 대응할 시기를 놓쳤고 이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군부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반란군은 이른바 신군부를 세운 후에 5.17 쿠데타를 거쳐서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전두환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본인 작성, 나무위키,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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