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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이주 시작 해외 이민史

근현대시대 대한민국

by 느낌 . 2024. 1. 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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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U.S) 하와이 섬 사탕수수 밭 이민 노동자
2023년 현재 한국인 세계 분포 현황 지도
일제강점기 고려인 강제 이주 이동 지도
강제 이주 고려인 분포 지도
2016년 현재 한국군 해외 파병 지역 분포 세계 지도
KOICA(국제개발협력) 한국인 해외 봉사단 활동 분포 세계 지도

인류는 세월이 거듭 지나고 끊임없이 이곳 저곳으로 이동을 해왔다. 한민족도 마찬가지이다. 한민족도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이동을 해왔다. 하지만 근현대 시대에 가장 크고 대규모의 한민족의 이동은 아마도 조선 왕조가 망국의 길을 접어들면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시대로 보여진다. 1800년대 즈음에 조선인들이 한반도 이북 지역의 중국 만주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자치 구역을 형성했다. 고려인(高麗人)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현재의 러시아 및 옛 소련 지역(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으로 이주한 이와 그 친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인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로 카레이츠(Корейцы)’라고도 부른다.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된 이유는 첫번째로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인 스탈린이 서명한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극동 지역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 첩자의 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있었다, 두번째는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고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던 포시에트 군은 고려인들이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소련에서 실시된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자체적으로 인구가 급감하게 된 카자흐 공화국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 인구를 공급하고 아울러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고려인의 강제 이주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한 해당 지역의 기차역을 출발하여 노보시비리스크 지역까지 갔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카자흐 공화국의 우쉬토베 지역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첫번째 이주정착지로 선택된 도시였다.카자흐 공화국의 우쉬토베는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첫 이주정착지로 선택된 도시였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가을에도 러시아 모스크바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 조치가 이루어졌다. 조선 왕조가 망해가던 시기에 조선인의 태평양 바다에 위치한 미국 하와이 섬 이주는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했다. 이민자의 수는 121명이었으며 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7200여명의 이민자가 제물포항을 통해 떠났다. 하와이가 미국의 영토가 된 지 오년 후였기 때문에 한인 이민들의 입국 수속은 미국 이민국이 담당하였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능력과 관계없이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었고 루나(십장)는 마치 가축 같이 조선인들을 대하며 채찍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새벽 다섯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고된 노동으로 받는 월급은 당시 미국 돈 가치로 약 16달러에 불과했다. 이 돈으로는 생계를 유지하는것 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중남미(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지역의 한국인 이민은 1962년 12월 18일에 제1차 브라질 이민단이 부산항을 출발하여 다음 해에 2월 12일 산토스항에 도착했다. 이후 "브라질"로의 이민은 1966년 5차 이민단까지 이어져서 총 193세대가 입국했다.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은 1962년에 리오네그로 주 라마르께 지역의 개간지를 무상 임대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965년 8월 17일 라마르께 영농 이민단 1진 13세대 78명이 부산항을 출발하여 1965년 10월 15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도착했다. "파라과이"의 농업 이민은 한국의 이민 사업가 이관복이 당시 파라과이 정부의 실권자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150여 명의 이주 허가를 받아내어 시작됐다. 1965년 2월 17일에 농업 이민 1진 30세대 95명이 부산항을 출발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를 경유하여 같은 해 4월 22일 에아순시온 항구에 도착하였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한국인 농업이민자들은 원래 배정되었던 개간지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도저히 개간하고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농기구조차 갖추지 못했고 개미 떼와 독이 있는 벌레와 싸우며 주거지 시설을 마련하고 양식을 구하느라 고생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농업 경험과 기술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순시오과 같은 대도시로 재이주했다. 대도시로 이주한 한인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행상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물건들을 팔다가 나중에는 현지에서 물건을 사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판매를 하였다. 1980년대에는 신규 한인 이민자들이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들어와 한인 의류업에 질적 성장이 있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전문 의류 상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기는 멕시코가 중남미 한인사회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87년 멕시코 정부가 무역 자유화를 실시하고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에게 관세 혜택을 주면서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급증하였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하여 한국정부에서 유럽의 독일(서독)에 7900여 명의 한국인 광부를 파견했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한국 정부에서 유럽의 독일(서독)에 1만여 명의 한국인 간호사를 파견했다. 이들 중에는 세월이 흘러서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일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밖에도 문화 교류, 종교 활동, 교육, 군사 협력, 비즈니스 사업 차원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해외 건설 붐으로 한국인 노동자가 건너가서 일을 하고 있고 국군의 군대, 군함, 군용기 등을 군사적 목적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와 바다, 하늘길에 파견하는 해외 파병(海外派兵, Overseas Deployment Of Armed Force)도 이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여러 국가로 한국인 이민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 차원의 대외 무상 협력 사업으로 우리나라와 개발도상국가와의 우호적인 협력 관계 및 상호 교류를 증진하고 이들 국가들의 경제사회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국제 협력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1991년에 한국국제협력단(韓國國際協力團, 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이 설립되어 139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본인 설명. NAVER 지식백과, 문화원형백과 (물류와 문류기반의 항구문화), 국방과학기술용어사전, 국가기록원(재외한인의 역사),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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