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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상업 경제의 발달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4. 1. 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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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市場)의 기원을 살펴보자면은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에도 교역이 이루어졌고 멀리 바다 건너에 일본의 조몬인과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서기 479년부터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12년 3월에 처음으로 경사(京師)에 시장을 개설하여 사방의 재화를 유통시켰다는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저자"라고 불리었던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는 시장이 있었고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반찬거리를 파는 작은 규모의 시장도 있었다. 화폐로서 돈은 물물교환 시대에는 조개껍데기 , 곡식 곡물, 베(옷감) 등이 실물 물품 화폐를 사용하다가 금(金), 은(銀), 동(銅) 등의 금속 광물로 휴대하기 편하게 작은 금속 조각을 만들거나 금속 광물로 작은 동전 모양으로 가운데에 구멍이 뚫어서 주조하여 화폐로 사용하였다.
 
벽란도 (碧瀾渡) - 서기 934년(고려 태조 왕건 17년) 7월에 고려 상선이 중국에 있는 후당(後唐) 등주(登州)에 가서 교역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의 선박이 청주(靑州)에서 무역을 하였으며 958년(고려 광종 9년)에는 후주(後周)에서 비단 수천필을 구리(동)로 바꾸어 거래를 한 무역 기록이 있다. 이러한 대외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벽란도였다. 개경에서 30리 거리의 서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이라고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碧瀾亭) 정자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이름을 지었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나라(宋)와 요나라(遼), 금나라(金), 일본(日本) 등의 주변 나라와 이루어졌고 멀리 중앙아시아의 아라비아에 지역에 있던 대식국(大食國)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넓었다. 각국의 해상선단이 개경의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 모였고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서 역할을 했다. 고려로서는 송나라와의 무역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때 항로는 남북항로가 주된 간선이었다. 북선항로는 산동 등주(登州) 방면에서 동북 직선로에 의해 대동강 어구를 거쳐 옹진항 또는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고 남선 항로는 명주(明州)에서 동북으로 흑산도에 이르고 다시 동북행하여 서해안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는데 문종대 까지는 주로 북선항로가 이후에는 주로 남선항로가 발달하였다. 상행위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이 올때에도 우벽란정에 조서(詔書)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서 사신을 대접하였으며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는 등 외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육의전 (六矣廛) - 육주비전(六注比廛), 육부전(六部廛), 육분전(六分廛), 육장전(六長廛), 육조비전(六調備廛), 육주부전(六主夫廛) 등은 다 육의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순조 원년(1801)에 전의 수가 여덟 개로 늘어났으므로 팔주비전(八注比廛)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주비"는 수(首), 장(長)으로 최고위급 우두머리를 뜻한다. 육주비전이란 서울의 시전(시장) 중에서 가장 최상급 여섯 개의 수전(首廛)이라는 뜻이 된다. 조선 태조 때에 서울의 종로 연도에 세운 공랑상점 시전 중에서도 규모가 큰 상점을 골라서 인조 이후부터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육의전이 자리잡고 있던 거리를 종루 또는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렀고 허가를 받은 상점들을 시전이라고 불렀다. 시전 상인들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대거나 장사한 뒤에 남은 수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바쳤다. 이후 한양에는 운종가(종로)를 따라 시전 상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큰 규모의 시장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시전 상인들 가운데에서도 규모가 큰 거상(巨商)들이 생겨났다. 비단과 명주, 무명, 모시, 종이, 생선 등을 취급하는 점포였다. 시기마다 이름은 조금씩 달랐지만 보통은 비단을 파는 상점은 선전, 명주는 면주전, 무명은 면포전, 모시는 저포전, 종이는 지전, 생선은 내외어물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6개의 상점을 일반 시전과 구분하여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육의전에는 한양에서 장사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특정 상품을 자신만 취급할 수 있는 독점권이 주어졌다. 또한 허가받지 않은 상점인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저포전 상인이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종이를 팔고 있는 난전을 발견했다면 관청에 신고하거나 관원을 부르지 않고도 직접 판매 행위를 막을 수 있었다. 육의전은 나라에서 준 특권을 이용해 점점 규모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큰 자본을 가진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특혜를 받는 상인들이 생겨나자 육의전도 점차 쇠퇴해갔다.
 
향시 (鄕市) - 전국적으로 1천여개가 있었는데 이미 고대시대부터 형성된 곳으로 장(場)이라는 이름으로 대개 5일마다 한번씩 열렸으며 지방 백성들이 상거래장으로 활용하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만든 가내수공업품이나 곡물, 가축 등을 거래하였다. 따라서 향시는 지방 백성들의 유일한 상거래 장소이자 정보 교환의 장이기도 했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지방에 열리던 장시(시장)이다. 
 
객주 (客主) - 주로 위탁을 받은 물건을 팔아주거나 매매를 알선하며 그에 따른 부수적인 여러 기능을 맡았고 여각, 저가, 저점 등으로도 불리었다. 객주는 객지에서 장사하는 여러 상인들의 주인 역할을 하였는데 주도니 업무는 생산자나 상인으로부터 매매를 위탁 박은 물건을 모아서 상인들에게 유통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숙, 금융, 창고, 운송 등 여러가지 주선 행위를 도맡는 자본가였다. 객주는 다루는 물품과 일에 따라서 일반적인 객주를 의미하는 물상객주, 미곡, 어물, 소금, 과채, 시탄 등 부피와 무게가 큰 품목만을 취급하며 창고를 반드시 갖추고 있는 여각, 중국인 상대로 장사하는 만상객주, 보부상을 상대로 하는 보상객주, 일반 보행자를 상대로 하는 보행객주, 금융업을 전업으로 하는 환전객주, 가정용품을 다루는 무시객주, 지방의 관리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의 연락과 숙박을 제공하는 여각 주인을 일컫는 경주인(京主人), 행상들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전문으로 하는 원우(院宇) 등이 있다. 
 
보부상 (褓負商) -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부상(負商)은 삼국 시대 이전에 보상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보부상들은 상호 간에 규율, 예절, 상호 부조의 정신이 아주 엄격했으며 조선시대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식량을 조달하는 따위의 많은 일을 하였다. 보상은 주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했고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가내수공업품이나 토기, 철기 등을 취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취급하는 물품을 엄격히 구분하여 상대방의 물품을 취급할 수 없도록 하였다. 보상과 부상은 처음에 별개의 조직이었으나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임원은 민주적인 투표로 선출되었고 임원들이 지도자를 뽑았는데 지도자를 "접장"이라고 불렀다. 접장은 전국의 "군"과 "도" 단위 마다 한명씩 존재했고 군을 맡고 있는 접장을 군접장, 도를 맡고 있는 접장을 도접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든 접장을 이끄는 지도자를 도반수(道班首)라고 불렀으며 각 중앙의 임원들은 하부 조직의 접장들로 구성되었다. 일정한 임기가 정해져 있었고 조직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서 전국의 시장을 떠돌아 다녔으며 조정의 관아에서도 보부상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조운선 (漕運船) - 국가에 세금으로 수납(收納)하는 곡식(쌀)으로 조세미(租稅米)를 지방의 창고에서 경창(京倉)에 운반하는데 사용하였던 선박이 조운선이다. 선박의 구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1461년(조선세조 7년) 당시에 좌의정이며 전선색제조(典船色提調)인 신숙주(申叔舟)가 "한 척의 배에 격판(隔板)을 설치하고 철거로써 조선(漕船)도 되고 전투선(戰鬪船)으로도 되게 하자"고 건의했고 조정에서 그의 의견대로 조운선을 제조하여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조운선은 임진왜란 때 전투용 선박으로 사용된 판옥선의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깊이가 얕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이 용이하고 연안 바다 해변을 항해하기 유리한 구조로서 선박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을 것이다. 다만 선박 크기와 규모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16세기경까지에 제작된 배는 모두 전투용 선박 같이 배를 만들었기에 조운선을 병조선(兵漕船)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에는 선장격인 사공(沙工)과 선원인 격군(格軍)이 승선하였는데, 해운(海運)에는 사공 1명과 격군 15명, 수운(水運)에는 사공 1명, 격군 3명이 배속되었다. 조운선 선박의 제작 건조는 한반도 서남해안 태안, 변산, 완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문화원형백과 조선후기 시장,  한국사 사전 1-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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