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渤海)와 일본(日本)과의 외교 관계는 727년(발해 무왕 인안 8년) 8월 발해에서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國交)를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발해가 일본과 국교를 맺은 것은 당시에 당나라(唐)와 신라(新羅) 등과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러자 발해는 일본과 통교하여 신라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고자 했던것 같다. 이후 발해와 일본 두 나라 사이에는 사신(使臣)들의 왕래가 비교적으로 활발하여 920년까지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30여 차례에 오고 갔다. 양국은 사신이 오고 갈 때 예물 교환 형식으로 또는 상인들의 직접 교역 형식으로 교역을 행했는데 발해의 주요 수출품은 공예품과 범(호랑이) 가죽 등을 비롯한 각종 동물 털 가죽, 인삼 등 약재류 등이었다. 발해의 수입품은 비단을 비롯한 직물과 수은, 옻 등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교류를 통해 발해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발해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발해어(語)와 발해 음악(音樂)을 배워갔다. 발해 음악은 이후 일본 음악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8세기에 들어서서 발해에서 일본에 전해준 선명력(宣明曆)은 그 후 일본에서 800여 년 동안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서(唐書)의 발해전에는 발해 남쪽 바다에 다시마 해조류가 있고 이것을 당나라에 수출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기요람(1808년) 문헌에는 다시마는 대구, 해삼, 홍합과 명나라(明)에 조공으로 바쳐졌다. 특히 발해는 자국산의 다시마 뿐만 아니라 일본산 다시마의 중계 무역에도 활약하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선사에서는 발해에서 일본과 교류 때 남경남해부는 신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다시마의 산지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건국 후에 발해는 일본과 통교하려고 시도했다.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었고 이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빈번한 교류가 있게 되었다. 발해는 일본의 신라 침략 동맹 공격 계획은 거절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가는 통로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가장 가깝고 안전한 이동길이었다. 조선시대의 조선통신사도 대한해협을 통해서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좋지 않고 바닷길이 험해서 고생 고생한 기록도 남아있다. 다른 이동길로는 제3국인 신라의 영토 지역이었기 때문에 발해는 동해 바다 한가운데를 그대로 건너는 루트로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 사신단의 주요 목적지는 일본 호쿠리쿠 지역 노토 반도 등 카가 지방으로 이 지방에서는 이사카와현 누가미마치 유적이나 고마츠 시 시바야마가타에서 발굴된 한국 고유 난방 시설인 온돌이 포함된 집 등 발해인과의 교류 흔적이 발견되었다. 첫 번째 사신단은 서기 727년인 인안 9년 무왕 시기에 일본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의 목적은 일본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리고 대외적으로 알렸다. 첫 번째 사신단은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 고제덕 등 24인의 무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신 파견의 목적이 군사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신들은 표류하여 도착한 곳에서 일부가 살해되었고 12월에는 수도 헤이조쿄에 당도하여 728년 정월 쇼무 천황을 만나서 선물을 전달하였다. 속일본기의 기록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쓰여 있다. 발해의 두 번째 대일(對日) 사신은 발해의 당나라 공격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발해 사절단은 선물을 교환하고 활쏘기 대사례에 참석하였으며 발해악을 최초로 일본에서 연주하였다. 이 사절단을 맞이한 통역관은 신라학어(新羅學語)라 불리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유학해 있던 신라인 학생들이었는데 신라인 역관(譯官)이 발해인들의 말을 통역하였다는 점에서 발해와 신라의 언어가 비슷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발해의 세 번째 대일 사신은 서기 752년 대흥 15년 문왕 시기에 보국대장군 모시몽(慕施蒙)을 파견하였다. 당시 일본은 과거에 고구려가 신하로써 예의를 취했다는 것을 근거로 발해가 일본에 신하로 칭하지 않음을 문제로 삼았는데 정확히는 대신라견제책을 모색하고자 고구려쪽에서 형제국임을 알렸다. 일본은 758년에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던 중 발해를 끌어들이기 위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발해는 양승경(楊承慶)과 양태사(楊泰師), 풍방례(馮方禮) 등을 일본에 보내어 답방했다. 하지만 발해는 당나라의 안사의 난 이후 요동 안정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나라 또한 발해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책봉하는 등 발해와 화친하면서 동아시아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은 8세기 후반 신라와 관계가 나빠져 공식 교류가 중단되었는데 하지만 전라남도 완도 지역에 해양 군사 집단으로 청해진(淸海鎭)이 있던 장보고가 무역상을 자처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라와 일본의 사무역(私貿易)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838년에 일본에서 당나라에 바다길로 오고 가던 견당사(遣唐使)가 중지되었다.
*본인 작성, 인터넷판 오마이스뉴스 2023년 03월 22일자 신문 기사 (https://news.nate.com/view/20230322n19340), NAVER 지식백과 고증세사사전, 나무위키 참고.
신라시대 살았던 동물 사건 (0) | 2024.12.24 |
---|---|
후백제 동아시아 외교 교역 (0) | 2024.09.22 |
궁예 후고구려 전쟁 기록 (0) | 2023.02.13 |
발해 건국 성장 멸망 과정 (0) | 2022.08.19 |
신라왕 우리 고유 방식 이름 (0) | 2022.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