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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피의 숙청 벌어진 반란

다양한 해석과 탐구 평가

by 느낌 . 2024. 3. 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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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날이 갈수록 변하는데 지배층 세력들간의 경쟁 다툼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렵고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궁궐 안에서 신하들은 조정(朝政)에서 붕당(朋黨)을 조성하고 서로 의견 대립을 하면서 화합이 쉽지가 않은 시절이 있었다. 여기서 붕당은 오늘날의 정당(政黨)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늘날의 정당은 민주주의 정신으로 국민의 의견을 모아서 제정한 헌법(憲法)을 기반으로 구성된 공인 정치 대표 단체를 말한다. 반면에 붕당은 조선시대에 정치 논리 성격이 맞는 조정 관리끼리 서로 모여서 편을 가르고 만들어진 정치 단체였다. 붕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치 계파 파벌이었다. 붕당의 시작은 전국의 각 지방과 지역 마다 서당에서 향교로 지방 교육 기관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들이 사림(士林)을 형성하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중앙 정부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거쳤고 과거 제도를 거쳐서 중앙의 조정 관리로 진출하였다. 세월이 지나고 각 지역에서 지방에 있는 교육 기관은 조정 관리를 배출하면서 유명해지고 각 지방과 지역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강력한 학벌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킨 모교(母敎)를 뜻 깊은 학연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어서 중앙 조정 관리가 되고 나서는 어릴적부터 같은 교육 기관에서 동문수학을 했던 동문과 세력을 이루고 붕당을 형성하였다. 전국의 각 지방과 지역의 교육 기관이 배출한 동문이 만든 붕당간에 정치적으로 논쟁을 하면서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분별한 세력 다툼으로 인해서 그 폐해와 폐단이 심하였다. 붕당 대립의 대표적인 폐단의 사건은 임진왜란 전쟁이 일어났던 조선 선조(宣祖) 임금 시절과 광해군(光海君) 집권 시절이었다. 영조(英祖) 임금 시절과 사도 세자를 음식을 먹이지 않고 굶겨서 죽인 사건이 있었고 정조(正祖) 임금 시절에는 탕평책(蕩平策) 정책으로 잠시나마 신하들의 격한 전쟁을 안정시켰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신하들은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데에 혈안이 되었다. 허위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서 왕에게 모함을 하여 일러 바치며 사화(士禍) 사건을 만들었다. 정적을 감옥에 가두고 죄를 지은 것이 맞다고 말하게 하기 위해서 살육의 고문을 가하고 목을 베었다. 그 다음에 정적이 배우며 성장한 연고지 지방과 지역의 학벌 학당까지 뿌리를 뽑듯이 피 바람이 불었고 괴멸시키려했다. 조선 중종(中宗) 시절에 조광조(趙光祖)는 토지 정책, 노비법 등 개혁 정치를 주창(主唱)하다가 반대파였던 훈구파(勳舊派)의 계략으로 죽임을 당했다. 사건의 정황은 궁궐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물로 발라서 글씨를 쓰고 벌레가 글씨대로 나뭇잎을 갉아서 먹게 한 다음에 그 나뭇잎을 중종(中宗) 임금이 우연히 보게 하였다 그 글씨 내용이 조광조가 훗날 왕이 될 사람이라는 뜻으로 결국 조광조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였다. 이렇듯이 나라의 안밖으로 사정이 어려운 마당에 시대가 지나고 끊임 없이 변해도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관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되풀이 되었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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