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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그리고 미군정 과도기

근현대시대 대한민국

by 느낌 . 2025. 1. 16.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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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0일 열린 서울 시민 주최 연합군환영대회에서 주한미군사령관이자 군정사령관인 하지 중장(앞줄 가운데)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 왼쪽은 아놀드 군정장관이고, 오른쪽은 하지의 개인 통역이자 비서실장인 이묘목이다.

 미군정(美軍)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의 미군이 남한(南韓)을 통치하였다. 미군정(美軍政)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서 지도상 한반도를 기준으로 북위 38도 이남에 위치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설치한 군정청이다. 미 군정청은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직후 재조선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일본 본토로 돌려보냈다. 우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당 형태로 정치 세력을 전환했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도 정당(政黨)을 조직하였다.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고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의 행보를 좋게 보았지만 대중적인 지지율은 낮은 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지지율이 높았던 이승만을 한국민주당과 연대하도록 교섭을 진행하였다. 미군정은 김구와도 접촉하였으나 고집스럽게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던 김구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6년 1월에 미곡수집령이 발표되었으나 익숙치 않은 운영으로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고 농작지 소작제, 토지 분배 문제 등을 놓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이 전달되면서 남한 지역의 정치판은 우익 측에서 이승만, 김구이 소속되어있던 한국민주당 등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고 좌익 측의 박헌영 등은 처음에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중립적인 행동을 보였지만 박헌영 등이 소련에 갔다온 이후에는 신탁 통치 찬성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중도 세력 측은 신탁통치 방안을 보류를 하거나 수용을 하려는 반응을 보였으나 한반도 내부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안을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남한 시민의 지지는 우익 측으로 향했고 좌익 측의 세력은 축소되었다. 좌익 파벌과 우익 파벌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중도파의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우익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도 신탁 통치에 대하여 다른 우익 계층과는 다르게 비교적으로 좋게 보는 발언을 하였지만 이후에 암살을 당했다. 이후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위원회는 참여할 정치 세력을 놓고 미국과 소련의 양측이 대립하면서 중단되었다. 소련 측은 3상회의안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은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 측은 3상회의 안에서 한반도 세력이 직접 참여하였기에 한반도 내부에서의 정치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외하고 논의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모든 정치 세력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에 회의가 중단이 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 지역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국방경비대, 경찰 등을 창설하거나 강화하며 좌익 측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는 1946년 초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주도하에 기존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산업 국유화 등의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정책으로 인해서 많은 월남민들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와의 연관성은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이 정책을 주도하고 우익을 우선적인 숙청의 표적으로 삼았기에 대개 공산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 세력 등으로 이어졌다.백범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남한과 북한이 서로 각자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북한으로 가서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했지만 당시 북한은 단독 정부 수립 방안을 진행하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적인 합의를 하였고 북한의 정치적인 대 내외 홍보에만 이용되고 말았다.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반대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의 과정에서 수 많은 민간인이 다수 학살을 당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정부 수립 문제로 대립을 했는데 그 이유는 김구는 남북 공동 정부를 수립하는것을 이승만은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김구는 남북 단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이승만과 김일성을 설득했으나 두 사람 모두 다 거절을 하였다.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을 했고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에 김구는 참가를 하지 않았다.
 
*본인 작성, NAVER 어학사전,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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