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말기 시대에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 세력들은 본격적으로 한반도 땅 조선을 식민지(植民地)로 삼고 지배(支配)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에 머리가 깨어있던 사대부 지식인들이 조선을 서양식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의 개화파 사람들 이야기다. 근현대시대에 일본은 정부(政府)와 일본 왕실의 지원하에 적극적으로 각종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고 국력을 키웠다.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조선도 그렇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1800년대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의 주요 인물은 홍영식, 김옥균(金玉均),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다. 자료를 참고해서 말하자면 "개화"(開化)는 사전적인 의미로 사람의 지혜가 열려서 새로운 사상(思想)과 문물(文物) 그리고 문화(文化), 새로운 법(法) 그리고 제도(制度) 등을 가지게 됨을 이르는말이다. 더욱이 "개화 운동"은 조선 시대 말기에 갑오개혁으로 정치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한 사건이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은 당시의 조선 왕조의 "왕"(王)이었던 "고종"이 조선을 통치하던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사이에 추진되었던 개혁 운동 사건이다. 주요 인물들이 개화 정당(政黨)을 구성하여 조선 조정(朝廷)에 파벌(派閥)을 형성했고 정치세력을 만들었으며 정권(政權)을 잡았다. 3차에 이르는 개혁을 했는데 기존의 문물제도를 서양에서 시행하는 제도를 모방하여 근대식으로 고치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갑오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을 추진했다. 조선 군대를 새로운 방식의 신식 군대로 바꾸기 위해서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여 당시에 일본군 소속 장교에게 군사 훈련을 맡기었다. 통신 우편(郵便)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개화파의 홍영식(洪英植)이라는 인물은 우정총국(郵征總局)을 건의하여 세웠다. 각 지방마다 "우표"(郵票)를 붙인 편지를 집배원이 배달하여 사람들마다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에 홍영식 (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의 50명의 장사(壯士)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1500명의 청나라 군대를 도저히 대항할 수 없었고 일본 군대도 청나라 군대에게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무력 공격에 패배함으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三日天下)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당시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명성황후(민비)의 외척 세력인 민씨 수구파(守舊派)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청나라(당시의 중국 세력)는 조선에 군대를 보냈고 조선에서 일본 군대가 바다에서 청일전쟁으로 승리하기 이전의 시기라서 일본 군대는 군사적으로 청나라 군대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갑오개혁이 실패한 다른 이유로는 당시의 조선이 "조선 왕조 왕실"이 존재하고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개화파는 앞서 말한대로 서양식으로 새로운 법과 제도를 정비하려했으나 여전히 조선은 왕조 국가였기에 "조선 왕"의 말 한마디가 곧 국법(國法)이었다. 그래서 군주제도였기에 민주주의 공화국 방식의 제도를 만드는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고종 임금의 아버지이자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도 개화파에게 있어서 장애물이었다. 명성황후(민비)는 처음에 일제 세력을 끌어들여서 조선의 조정에 영향력을 키운 인물이다. 비록 식민지 지배를 목적으로 일제 세력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 때문에 자기자신이 하고 싶었던대로 할 수 없던 능력 없는 "왕"이었고 흥선대원군은 미국 세력과 프랑스 세력과 무력 전쟁을 하면서 조선의 지역마다 척화 비석(斥和碑)을 세웠다. 그렇게 서양 문물을 멀리했다. 명성황후는 서양식 사치품에 현혹되어 나라를 망쳤다. 값 비싼 자동차를 들여오고 궁궐에 "석조전"(石造殿)이라는 서양식 궁전을 짓고 분수대를 설치했다. 궁궐에 발전기(發電機)를 설치하고 전기 가로등을 설치했다. 그리고 고종 임금은 일제 세력과 손을 잡고 조선 왕조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이름의 나라로 바꾸었다. 법과 제도는 조선 왕조시대 그대로였다. 오랜 시절 동안 조선은 중국 세력의 신하(臣下)의 나라였다. 이러한 사대관계를 버리고 전세계적으로 조선이 황제의 나라이자 독립국임을 선포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개화파 인물들은 조선에서 더욱 설 자리가 줄어들게 되었고 김옥균 등의 인물들이 야심차게 준비하여 시행한 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이 났다. 일부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화파들은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
*본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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