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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古朝鮮 평가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1. 7. 10.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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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역에서 발굴한 고조선 시대 유물

고조선(古朝鮮)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평가해보고자 한다. 단군 왕검이 세운 나라인 고조선은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나라인 조선(朝鮮)과 구별하기 위해서 나라 이름 앞에 고(古)를 붙여서 옛조선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더욱이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 삼국유사에서도 단군 조선을 옛 조선 고조선(古朝鮮)이라고 기록되어 소개하고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108년 멸망한 우리 한민족이 세운 첫번째 국가이다.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단군왕검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바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여기서 곰 한 마리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고 이에 환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견디게 했다. 호랑이는 이를 못 참고 굴 속을 뛰쳐나왔고 곰은 이를 견뎌내서 웅녀(熊女)라는 이름의 여인이 되었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더니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단군 왕검(壇君王儉)이다. 단군 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지 50년이 되는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고 1500년 동안 백악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箕子)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94년까지 고조선 지역을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기자 조선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역사학계는 말한다. 중국 은나라에서 살았던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뒤에 그와 그의 자손들이 다스린 나라를 "기자 조선"(箕子朝鮮)이라고 한다.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9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상서대전"이나 한서(漢書), 사기(史記) 등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의 왕족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조카인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이 폭정을 일삼았고 그러자 기자는 주왕을 비판하였고 기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라 사정이 더욱 어려워진 은나라는 끝내 멸망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자는 고조선으로 가서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武王)이 기자의 학식을 높이 평가해서 고조선의 임금으로 임명했다고 적은 역사서도 있고 기자가 스스로 고조선 지역으로 가서 임금이 되었다고 기록한 것도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일부 유학자들이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믿었다. 기자동래는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현재는 기자 조선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알 수 없고 실제로 존재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우리 역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견해가 많다. 그 다음의 고조선 시대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와 반고가 저술한 한서(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머리에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고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갔다. 고조선 준왕(準王)의 명령으로 위만은 처음에는 고조선 변방 영토를 지키는 신하가 되었다. 이후 차츰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오랑캐 및 옛 연나라 제나라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서 거느리고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고조선 수도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쿠테타를 일으켰다.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때가 바로 혜제(惠帝, 기원전 195년~기원전 188년) 즉위 때이다. 이처럼 위만왕조는 이전 준왕(準王) 시대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하고 위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민 고조선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켰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부 신하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臨屯)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서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 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匈奴)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漢)나라는 마침내 기원전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고조선 지배층의 내부 분열과 한나라의 간계(奸計)로 결국 기원전 108년에 우거왕(右渠王)이 살해되었고 고조선의 신하였던 성기(成己)가 반란을 일으키고 계속 항전했지만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본인 작성, 삼국유사, NAVER 지식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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