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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夫餘 역사 평가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21. 6. 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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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 扶餘)의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부여족이 북만주 일대에 세운 나라로 농경 생활을 주로 했고, 중국으로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은력(殷曆)을 사용하는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갖추었으나,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입으로 크게 쇠퇴한 이후, 그 영토가 대부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중국의 역사서(歷史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는 부여(夫餘)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토군(玄菟郡) 지역 에서 1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동쪽으로는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지방인 읍루(挹婁)와 가까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가까이 붙어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라는 강줄기 가까이 영토가 이르렀다고 하였다. 부여의 풍습 중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형수취수혼과 순장 매장 방식이다. 형수취수제(Levirate, 兄死娶嫂制)라고도 부르는데 남자의 경우 형이 죽은 뒤 동생이 형을 대신해서 형수와 다시 결혼하여 부부 생활을 계속 하는 혼인 풍습이다. 순장(殉葬)은 죽은 사람과 함께 여러 사람을 강제로 죽이거나 여러 사람을 살아있는 상태로 같이 땅 속에 묻는 매장(埋葬) 방식인데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람을 함께 땅 속에 묻는다. 많을 때는 1백명 가까이 같이 땅 속에 묻는다고 알려졌다. 부여족은 소와 말 등의 가축을 데리고 이동하며 풀을 먹이고 사는 유목 민족(nomad, 遊牧民)이다. 한 곳에 정착해서는 법치 국가(法治國家)로서 나라에 법(法)을 정하여 왕(王)이 백성을 다스렸다. 북부여의 건국 설화는 간단히 말해서 북방에 어느 나라가 있었는데 궁궐 안에 어느 여인이 계란 같은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갓난 아이를 가축 우리에 버리니 말과 돼지가 해치지 않고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아이가 성장해서 활쏘기를 잘했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짓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했다. 왕은 자신의 나라를 빼앗길까봐 동명을 죽이려했고 동명은 이를 알고 도망치다가 강을 만났는데 물고기와 자라가 수면 위로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주자 이를 동명이 무사히 건넜고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졌다. 이후에 동명은 "부여"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史)에서 이르기를 기원전 59년 지금의 한반도 북부 지역에 해모수(解慕漱)가 북부여(北扶餘)를 세웠고 아들을 낳아서 해부루(解夫婁)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뒤를 이을 태자(太子)로 삼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서 "해부루"가 동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동부여(東扶餘)라고 이름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 부여를 세운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의 건국설화를 고구려에서 마음대로 가져다가 썼는데 소수림왕 무럽으로 이때부터 고구려에서도 고주몽(高朱蒙)을 동명성왕이라고 불렀다. 다만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주몽은 먼저 알이 나왔고 시간이 흘러 알을 깨고 태어났다고 한다. 동부여(東扶餘)의 건국 설화는 해부루왕이 나이를 먹어 늙도록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태자를 삼고 있지 못하다가 못하다가 어느날 산천(山天)에 제사를 지내며 대를 잇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 가던 말이 큰 연못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눈물지었다. 왕이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지었고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그 다음에 대소(帶素)가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서기 22년에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無恤)이 쳐들어와서 공격했고 대소왕이 죽고 그 이후 동부여는 멸망했다. 동부여의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 때 완전히 멸망하였다. 고주몽이 세운 나라는 처음에는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 부르다가 그 이후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고 불렀다. 주몽과 같이 고구려를 세운 소서노(召西奴)는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북방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기원전 18년 지금의 서울 한강 근처의 땅에 백제(百濟)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 이후 서기 450년 즈음에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 시절의 고구려가 백제의 위례성을 공격했고 함락시켰다. 그리고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죽였다. 백제의 영토는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밀려나서 영토가 크게 줄었다. 그 이후 서기 538년에 백제는 성왕(聖王)이 도읍을 남쪽으로 사비(泗批)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이름을 지었다. 남부여는 백제도 그 옛날 북방 지역에 있던 부여의 후손으로서 지금은 그 남쪽에 있는 부여족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金海)라는 지역에 "대성동 고분군"(大成洞古墳群)이라는 이름의 옛 가야(伽倻)시대 지배층 무덤이 있는데 2000년대에 유적 발굴(發掘) 조사에서 그 무덤에서 부여족의 말을 꾸미던 각종 장신구와 청동으로 만든 그릇 솥 "동복" 등의 유물(遺物)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순장 매장 방식도 발견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김해의 가야 지역에는 오래전에 부여족들이 북방에서 한반도 남쪽 가야 지역으로 이주(移住)해서 정착해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부여(扶餘)는 고조선(古朝鮮)에 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건국한 나라이다.

*본인 작성, 삼국유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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