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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 마한 변한 진한

상고시대 고조선-부여시대

by 느낌 . 2017. 5. 23.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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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의 역사 -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경 한강(漢江) 유역으로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을 합한 이름이다. 고조선 시대에 "위만" 세력에 밀려난 "준왕"이 한반도로 남쪽으로 내려와서 마한 연합의 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소개되어 있는데 세력이 큰 나라는 1만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구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다고 한다.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3세기 전반의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 삼국지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되어 있다)의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고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마한 지역의 소국(小國, 규모가 작은 나라)들 중에는 초기의 백제(百濟)처럼 북방계의 남쪽 지방으로 이주한 유민들이 정착을 한 계기로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鐵器文化)를 받아들인 배경으로 대두되어 세력이 커진 집단도 있어서 그 형성된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마한 지역에서는 경상도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세형 동검 문화 단계)의 유물에 비하여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어서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백제 온조 집단(溫祚集團)의 한강 유역 이주를 계기로 마한의 여러 작은 나라 연맹체에서는 그 내부의 세력들의 판도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백제국(百濟國)은 초기에는 처음의 그 지역에서 살았던 작은 나라 연맹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마한왕에게 신록(神鹿)을 보내거나 전쟁 포로를 바치며 맹주국(盟主國)으로서 대한 우대의 격식으로 대하였다. 백제국 왕이 초기에 자신의 세력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마한 54개의 우두머리였던 목지국 왕에게 처음에는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백제국(百濟國) 세력권에 포함되지 않은 남부 지역의 마한 지역의 작은 나라 소국들도 비록 세력권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상당한 변화를 거치면서 4세기 후반에는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과 전쟁을 치르며 백제의 이름으로 영토가 하나가 되었고 그 이전까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듯이 영토를 지키며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했다.

*진한(辰韓)의 역사 - 진한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여러개의 정치 집단이었다. 그 지역 위치는 한강 하류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조선 중반기 즈음에는 지금의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역으로 보고 있다. 진한의 맹주는 지금의 경주에 있었던 사로국(斯盧國)이며 12개의 소국(小國, 작은 규모의 나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역사서 "삼국지"와 "후한서"(後漢書, 후한 시대 역사서) 동이전에는 진한 형성의 주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내용이 실려 있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辰韓)만이 옛 진국(辰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 동이전에는 삼한(三韓) 모두가 옛 진국(辰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국(辰國)을 남한(南韓) 전역을 전체적 합쳐서 부르는 개념으로 이러한 역사서 "후한서"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고 있다. 많은 양의 금속기를 소유한 "지배자"가 나타나서 정치 집단이 커지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주, 대구 지역에서는 위씨 조선계 금속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다량의 "청동기"와 "철기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발굴된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본다면 박혁거세(赫居世) 집단의 두각을 나타낸것과 마을 6촌(六村) 통합에 관해서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와 승려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두 역사서에서는 위씨 조선계 주민과 문화의 유입을 계기로 청동기 문화 단계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다수 통합되면서 "삼국지"의 진한 사로국(斯盧國)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의 옛 주민들이 유민이 되어 북방 지역에서 한반도 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경상도 경주 지역의 토착민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역사서 "위략(魏略)의 기록에는 왕망(王莽)이 지황연간(地皇年間, 서기 20년∼30년)에 한나라 무제(漢武帝)가 고조선이 멸망한 지역에 세운 제후국(諸侯國)인 낙랑군(樂浪郡)에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와 염사치(廉斯鑡)가 조공(朝貢)을 바쳤다고 한다. 당시 진한(辰韓)은 12개의 소국(小國, 작은 규모의 나라) 연맹체로서의 나라가 아니라 경주(慶州) 지역 세력권과 대구(大邱) 지역 세력권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에 소국(小國, 작은 규모의 나라)들이 모여서 각각 삼한의 군장(臣智, 신지)이 진한(辰韓) 지역의 소국(小國, 작은 규모의 나라)을 다스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변한(弁韓)의 역사 -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종족적 차이로 구분되기도 하고 낙동강 동쪽과 서쪽이라는 지역적인 구분에 의해서 나뉘어기도하나 "신라 세력권"과 "가야 세력권"으로 대비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사로국(斯盧國)의 세력권을 진한(辰韓)이라 하고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의 세력권을 변진(弁辰)으로 보기도 한다. 목지국의 진왕(辰王)에게 소속된 12국은 진한(辰韓)으로 그 나머지를 변진(弁辰)으로 보는 등의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역사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변진(弁辰)과 진한(辰韓)은 잡거(雜居)하며 언어와 법과 풍습 그리고 옷을 입고 먹고 거주하는 형태가 같았다. 다만 제사 지내는 풍속만이 다르다고 하여 진한과 변한은 지역적인 경계에 의해 구분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체적인 문화 기반이 동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1∼3세기까지의 와질토기(瓦質土器) 형태나 분포 상태도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서 3세기 이전 단계에서 이 지역의 정치 집단을 나눌만한 문화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진한, 변한의 구분은 소국(小國, 작은 나라)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치적인 관계와 경제적인 관계에 근거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진한과 변한은 철(鐵)이 많이는 나오는 광산 지대로서 유명하여 마한(馬韓),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 동예(東濊), 왜(倭) 등이 모두 이곳의 철을 구입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철기 보급 상태로 미루어 변진 구야국을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의 다수 소국들 사이에도 경주, 대구 중심의 세력권과 대비되는 일정한 세력권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3세기 후반 진나라(晋)에 사신을 보낸 동이제국(東夷諸國) 중에서 마한과 진한은 있으나 변한은 찾아볼 수 없다. 역사서 "삼국지"에서 나오는바에 의하면 변진에는 12개의 소국 이외에더 독립된 거수(渠帥)가 있는 여러 소별읍(小別邑, 소국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약한 세력의 작은 규모의 독자적인 정치 집단)이 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런 면에서 당시 변진이 특정한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하는 정점으로 일괄적으로 파악되는 집단체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므로 변진은 경상도 지역의 정치 집단들 중에서 진한 소국 연맹체 에 포함되지 않았고 개별적인 세력으로 존속하고 있던 정치 집단들을 전체적으로 합쳐져 있었다고 보는것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변진 소국의 대부분은 독립된 가야(伽倻) 소국으로서 5세기~6세기경까지 계속 성장하였다.

*본인작성, 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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