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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청해진 해상 교류

남북국시대 신라-발해시대

by 느낌 . 2021. 10. 6.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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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통일신라 해상무역

전라남도 완도 청해진 유적

신라(新羅)시대에 장보고(張保皐)라는 뱃사람이 신라와 동아시아 해상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장보고(張保臯, ?~846년)는 통일신라 시대의 장군(將軍)이었는데 본명은 궁복(弓福)이고 궁파(弓巴)라고도 불렀다.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어 활약했으며, 신라로 돌아온 후 청해진 대사(大使)로 임명되어 황해(서해 바다)와 남해 바다에서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나라와 일본을 이동하며 동방 국제 무역을 장악했다. 청해진(淸海鎭)은 서기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설치한 해군기지(海軍基地)와 무역 거점이었다. 장보고(張保臯)는 당나라에서 1만명의 군사를 데리고 와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대사(大使)로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海敵)을 물리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교관선(交關船)을 보내고 일본(日本)에는 회역사(廻易使)을 보내어 당나라(唐)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서기 836년(희강왕 1년)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徐羅伐, 지금의 경주)에서 왕위계승분쟁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일파가 장보고에게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군사를 요청했다. 그래서 장보고의 청해진은 신라의 정치적인 상황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서기 838년에 희강왕(僖康王)이 살해당하고 민애왕(閔哀王)이 즉위하는 정변(政變)이 일어났는데 청해진에서 머물고 있던 김우징 일파가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서 군대를 이끌고 서라벌로 갔다. 서라벌에서 승리를 거둔 김우징(金祐徵)이 신무왕(神武王)이 되었고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더욱 강하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서 중앙 귀족들은 장보고에게 위협을 느꼈고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서기 845년에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文聖王)의 두번째 왕비로 보내려 하였으나 신라 조정의 중앙 귀족들이 장보고가 딸이 신분이 천하고 낮은 신분의 섬 사람(海島人)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반대했다. 그래서 장보고의 딸이 문성왕의 왕비가 되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화가 난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신라왕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중앙정부는 청해진 세력이 강하였기에 정면으로 공격하지는 못했고 결국은 서기 846년에 몰래 염장(閻長)이라는 자객을 청해진에 보내어 술에 취한 상태였던 장보고를 암살했다. 당나라 시절 중국 동쪽 해안가에는 황해(黃海, 서해 바다)에는 신라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다. 신라방(新羅坊)은 8세기 중엽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원활해지고 양국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서 살았다. 이들 중에서 화이허(淮河)와 양쯔강 하류 지방에 추저우(楚州), 롄수이(漣水) 지역 등에서 모여 살았다. 도시의 한 구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해사 자치 구역을 형성했다. 산동(山東)반도, 강회(江淮) 지방, 항주만(杭州灣) 등에 당나라 때 다양한 신라 사람들이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은 주로 교역하던 상인이었고 견당사(遣唐使)라고 불리는 사신단과 학문을 익히러 간 유학생, 불법을 배우러 간 구법승(求法僧) 그리고 경제적으로 피난을 가서 있던 난민과 정치적 망명객도 상당수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 뱃사람들은 그곳에 절(사찰)을 짓고 그들의 바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는데 신라원(新羅院)이라고 불렀다. 신라 사람들은 주로 상업, 운송업, 무역업, 배 만드는 직업 등의 상공업에 종사했고 이들을 수부(水夫), 공인(工人)이라고 불렀다, 당시에 신라 사람들은 중국의 밍저우(明州), 쑤저우(蘇州), 양저우(揚州) 등의 지역의 국제적인 무역 항구에서 중동의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의 상인들과도 교역하였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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