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발해부흥운동 건국 과정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9. 8. 15:30

본문

발해부흥운동(渤海復興運動)은 926년 발해가 멸망하고 이후에 발해 유민들이 발해를 계승해서 발해를 다시 건국하려는 왕실 복원 국토 회복운동이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발해부흥운동 과정에서 세워진 최초의 왕조는 동단국(東丹國)이다.
 
동단국(東丹國, 926년~982년) - "동란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단국은 거란(契丹)이 발해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태조 아율아보기가 발해의 옛 영토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 설치한 허수아비 자치 정부의 괴뢰국(傀儡國)으로 "동쪽에 있는 거란국"이라는 뜻이다. 많은 발해인들이 관리로 뽑혀서 일했고 거란이 세운 요나라 시대에도 이어졌다.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에 동생인 야율덕광(요나라 태종)이 거란의 왕위에 올랐다. 후당(後唐)과의 원정 전쟁에서 돌아온 야율덕광은 야율배를 수도를 후한에서 랴오닝으로 옮겼다. 위기의 위협을 느낀 야율배는 930년에 후당으로 망명(亡命)했다. 동란국은 936년에 거란의 영토가 되었다. 동란국은 발해와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929년 동해 너머로 외교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교토의 일본 황궁은 발해가 아닌 것을 알고 동란국의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거절하였다.
 
후발해(後渤海, 926 ? 년~ 938 ? 년) - 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에도 929년에 고정사(高正詞)가 발해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고 송나라(宋) 시대에는 오사성발해왕(烏舍城渤海王)이란 칭호가 공식적으로 송나라에서 사용되어 동아시아에서 국제적으로 후발해의 존재를 인정받았다. 5국 송나라 시대에 외교 활동을 했던 "발해"를 후발해(後渤海) 또는 오사성발해(烏舍城渤海)라고 불렀다. 후발해의 건국세력에 대해서는 929년에 대씨(大氏) 성씨의 어떤 세력 혹은 대인선(大諲譔)의 아우였던 대씨 성씨의 세력이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  후발해의 뒤를 이어 정안국(定安國)이 건국되었는데 정안국의 건국 시점인 938년 무렵에 멸망하였다고 보아 10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 올야(兀惹) 정권이 거란(契丹)의 공격으로 붕괴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1007년으로 보기도 하며, 발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1003년에 후발해가 소멸되었다고 보거나 요사(遼史)의 기록에 근거해 1114년경을 그 소멸 시기로 보기도 한다. 중심지는 후발해, 정안국이 모두 자리잡은 압록강 유역으로 보기도 하고 대발해(大渤海)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지역이나 옛 부여부(扶餘府)에 가까운 곳으로 보기도 한다. 후발해의 건국은 동란국(東丹國)의 이주와 관련이 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발해의 옛 수도인 상경용천부에 거란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동단국은 발해유민의 끈질긴 저항으로 요양(遼陽)으로 옮겨갔다. 후발해의 수도는 옛 발해 수도가 있던 홀한성(忽汗城)이었으며 그 시조는 발해국의 대씨 성씨로 추측한다. 그러나 후발해의 대씨 성씨 정권은 곧 그들의 실질적 권력을 올야 출신의 오씨(烏氏)에게 빼앗겨 오씨발해(烏氏渤海)를 탄생시켰다. 975년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온 발해유민 출신의 장수 연파(燕頗)와 함께 발해의 옛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발해의 옛 장령부(長嶺府) 지역이었던 휘발하(輝發河, 回跋河) 유역에서의 싸움에서도 원군 7천명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979년경에는 정안국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고정사, 성문각(成文角) 등을 후당에 7차례나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발해와 중국과의 관계는 954년 7월 발해 호족(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0인이 후주(後周)에 귀화했던 기록이 마지막이다.
 
정안국(定安國, 938년~986년) - 926년 정월에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가 멸망하고 동단국(東丹國)이라는 거란의 괴뢰정권이 세워졌다. 928년이 동단국이 요동(遼東)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발해 멸망 이후부터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발해 유민의 저항과 활동은 더 격렬해졌다. 그 가운데 압록강 유역은 지세가 험난하고 압록강을 통한 외부와의 교통과 물자 공급이 유리하여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초기에 이 지역의 발해 유민 집단은 발해 왕족인 대씨(大氏) 성씨가 앞장서서 이끌었고 옛 발해의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지역 등을 지배하는 등 세력을 넓혔다. 대외적으로도 929년부터 936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발해라는 나라 이름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다. 926년 이전의 발해와 구분하여 "후발해국"이라고 부른다. 다른 나라와의 대외 활동은 954년 7월에 발해국의 호족 최오사(崔烏斯, 崔烏斯多) 등 30명 가까이 후주(後周)에 귀화(歸化)했다는 기록 정도이다. 970년에는 중국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당시 나라 이름은 정안국이었고 왕실은 열씨(烈氏) 성씨였다. 936년에서 97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대씨의 후발해국에서 열씨의 정안국으로 왕조가 바뀌어졌다. 934년(태조 17년) 7월에 발해국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명의 유민을 데리고 고려로 귀부(歸附)했는데 938년에도 발해인 박승(朴昇)이 3000여 호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부했다. 당시의 후발해국은 심각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렵에 후발해국의 주도권이 대씨 성씨에서 호족인 열씨 성씨와 오씨(烏氏) 성씨로 넘어갔다고 보여진다. 954년에는 발해의 호족 최오사 등이 후주(後周)에 망명한 사실도 있다. 열씨 성씨가 정권을 잡은 정안국은 970년에 송나라와 국교를 맺었다. 송나라는 대립하고 있던 요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정안국을 선택한 것이다. 981년에는 송나라에 보낸 정안국의 국서(國書)에 실린 왕의 이름은 오현명(烏玄明)이었다. 왕실이 열씨 성씨 가문에서 다시 오씨 성씨 가문으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열씨 성씨에서 오씨 성씨로 왕실이 교체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979년(경종 4)에 발해인 수만 명이 고려로 넘어온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정안국 내의 정권교체에 따른 영향으로 보인다. 이후에 정안국은 송나라와 요나라를 함께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는 지금의 중국 간쑤성(甘肅省) 방면에서 일어난 서하(西夏)의 공격을 막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정안국과 송나라의 외교 관계는 이어졌다. 당시 정안국은 자체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독자적인 국가로서 체제를 정비했다. 요나라는 고려(高麗)를 공격하면서 먼저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을 공격했다. 983년 10월에 요나라는 압록강 일대를 공격해 다음 해 4월까지 작전을 이어나갔다. 이 원정 전쟁은 고려의 북쪽 국경까지 미쳐 고려에도 영향을 주었다. 985년에 요나라가 재차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 해 봄까지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고 정안국을 멸망시켰고 정안국 옛 영토에 4개의 주(州)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 사실상 정안국은 986년에 멸망했고 발해 유민의 정안국 부흥운동도 끝이 났다.

흥요국(興遼國, 1029년~1030년) - 흥료국은 발해 고왕 대조영의 후손인 대연림이 1029년 요나라(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발해의 유민으로 요나라(遼)의 동경 사리군상온(東京 舍利軍詳穩)으로 있던 대연림이 요나라(遼)의 통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이용해서 1029년 군사를 일으켰고 요나라(遼)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서 흥료국을 건국하고 황제라고 칭했다.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 남부 지방, 북부 지방의 여진(女眞)도 대연림에 합류하여 세력과 규모는 커졌지만 고려는 흥료국의 국서(國書)를 거부했고 부유수(副留守) 왕도평(王道平)과 황룡부(黃龍府)의 황편(黃翩)이 어명을 따르지 않았고 발해 태보(渤海太保) 하행미(夏行美)가 함께 하지 않아서 같은 편이 되지 않았다. 1030년 요나라는 남경유수(南京留守) 연왕(燕王) 소효목(蕭孝穆)을 도통(都統)으로 국구상온(國舅詳穩) 소필적(蕭匹敵)을 부도통으로 해륙부대왕(奚六部大王) 소포노(蕭蒲奴)를 도감(都監)으로 삼아 대연림에 대한 공격했다. 대연림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대비하였으나 양상세(楊詳世)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려서 멸망했다.

대발해국(大渤海國, 대원국, 大元國, 1116년~1116년) -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 유민인 고영창(高永昌)이 1116년에 동경 요양성(東京 遼陽城)에서 건국한 나라이다. 대원국(大元國)이라고도 부른다. 1115년에 요나라(遼)의 부도(副都)인 동경(東京)의 유수(東京 留守) 소보선(蕭保先)이 일처리가 엄숙하고 잔혹해서 큰일을 당하자 호부사(戶部使) 대공정(大公鼎)이 곧바로 유수의 일을 대신 맡아보게 되었다. 1116년 1월에 발해 귀족의 후손이자 유수의 비장(裨將)인 고영창(高永昌)이 동경 소보처를 토벌하고 옛 발해의 영토였던 동경성을 장악했다. 요나라는 토벌군을 파견해 동경성 탈환을 시도했지만 고영창은 이를 막아내고 대발해국 황제로 즉위해서 연호를 융기(隆基) 원년이라 하였다. 귀덕주(貴德州) 수장(守將) 야율여도(耶律余睹)가 광주발해(廣州渤海)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고영창에게 귀부(歸附)하였다. 요나라 천조제(天祚帝)가 소을설(蕭乙薛)과 고흥순(高興順)을 보내어 고영창을 불렀으나 고영창은 거부했다. 1115년에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金)는 1116년 요나라를 정벌하기 전에 알로를 시켜 요양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대발해국(대원국)은 멸망하였다.

대발해국(대원국)은 발해부흥운동 과정에서 건국된 발해 유민이 세운 마지막 나라였다.
 
*본인 작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참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