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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麗遼 여요 전쟁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8. 1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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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
거란군

 고려 거란 전쟁은 서기 993년(고려 성종 12년)부터 서기 1019년(고려 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간 3차례에 걸쳐서 거란(요나라)이 고려를 침략한 전쟁이다. 서희(徐熙),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강감찬(姜邯贊) 등 여러 인물들이 활약한 전쟁이었다.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은 오늘날 중국과 몽골에 동화되어 사라진 민족이 되었다.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 역사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나라를 잃은 발해의 유민 일부가 요나라 군인이 되어 고려군이 되어 참전한 발해 유민과 서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발해 백성들은 고려 거란 각 나라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 1010년, 1018년(1019년)에 3차례에 걸쳐서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자주 이루어졌다. 993년(고려 성종, 成宗 12년) 10월에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 왔다. 1010년(고려 현종, 顯宗 1년) 11월에는 고려 신하 강조(康兆)가 고려 목종(穆宗)을 죽였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요나라 황제 성종(聖宗, 야율융서)이 직접 참전하여 고려에 쳐들어왔다. 1018년 12월에는 거란 장수 소배압(蕭排押)이 1015년에는 거란 장수 소적렬(蕭敵烈)이 고려 영토였던 흥화진(興化鎭)에 쳐들어왔다. 당시에 거란이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던 상태에서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고려가 건국했을 당시에는 지금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에 916년에 요나라(遼)를 건국하였고 922년(고려 태조 5년)에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냈다. 926년에 거란이 발해(渤海)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거란을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부르며 적대시하고  북진 정책을 시행하였다. 942년에는 요나라 태종(太宗)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요니라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를 보냈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였다. 고려 정종(定宗) 때는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였고 고려 광종(光宗) 때에는 서북쪽에 맹산, 숙천, 박천, 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으로는 영흥, 고원 등의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 시설을 지었다. 그리고 광군을 광군사(光軍司)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려는 송나라(宋)가 건국한 이후에 송나라와 화친 정책을 시행하였다. 975년에 통일 왕조를 세운 송나라는 985년(고려 성종 4년)에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거란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송나라는 압록강 지역에 발해 유민이 건국한 정안국(定安國)과 교류하며 거란을 함께 공격하려 했다. 그러자 거란은 고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요나라 태종(야율덕광, 耶律隆緒)이 후량(後粱)과 후당(後唐)의 전쟁에 동참하여 연운 16주를 얻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중국 남부 지역 침략에는 실패하고 죽었다. 그리고 요나라는 내부적으로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치싸움이 벌어져서 고려와 전쟁을 할 수 없었다. 982년 이후에 내부적으로 정치 상황이 안정이 되었다. 요나라 성종(야율융서, 耶律隆緒)은 986년에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켰고 991년에능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1019년에 고려 거란 전쟁은 끝이 났고 두 나라 사이에 사신이 오고 가면서 나라간에 외교 관계가 맺어졌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자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약화되었고 거란은 송나라도 침략할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약해졌다. 고려도 거란과의 전쟁을 겪으며 서북 지역의 영토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흥화진 북쪽 압록강 지역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에 천리장성을 쌓았고 수도 개경을 수비를 하기 위해서 나성을 쌓았다.
 
*본인 작성, 나무위키,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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