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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北伐論 영토 확장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4. 2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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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종서 장군 4군 6진 영토 확장 지도
고려시대 서희 장군 강동 6주 영토 확장, 거란 전쟁 지도
고려시대 윤관 장군 동북 9성 영토 확장 추측 지도
고려시대 이성계 장군 위화도 회군 지도

 
북벌론(北伐論)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서기 1636년(조선 인조 14년)에 일어나며 청나라가 조선으로 제2차 침입을 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청나라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상하 관계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조선은 그 사건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조선이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것이 북벌론이다. 하지만 북벌론의 뜻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시대별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고조선(古朝鮮)이 한반도 동북 지역에 생겨나서 북쪽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전쟁을 벌인 사건도 북벌로 볼 수 있고 부여(扶餘) 시절도 그리하였고 고구려(高句麗)가 영토를 중국 대륙을 정벌하여 땅을 넓힌 것도 같은 논리이며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하면서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국했고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것도 엄연히 말하자면은 북벌론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사건들이다. 한반도 북쪽 지역 방향으로 영토를 넓히자는 이론인 것이다.
 
고려시대 서희(徐熙) 장군 강동 6주(江東 6州) 영토 확장 사건 -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크게 키운 거란(契丹)은 서기 993년에 거란 장수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에 침입했다. 서희는 거란이 전쟁보다는 고려가 송나라(宋)와 외교 관계를 끊기를 바란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지었다. 당시 거란은 압록강 주변의 땅이 거란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내세워 옛 고구려의 영토인 압록강 주변의 땅을 돌려받기로 했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거란을 물리친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있던 여진족(女眞族)을 몰아내고 홍화,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6주를 설치했다. 이것이 강동 6주이다. 하지만 거란은 계속해서 강동 6주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서기 1018년에는 소배압이 군사를 이끌고 다시금 침입했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지역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며 고려의 땅이 되었다.

고려시대 윤관(尹瓘) 장군 동북 9성(東北 9城) 영토 확장 사건 -  서기 12세기 초반에 윤관이 별무반(別武班)을 이끌고 여진족을 물리친 후 쌓은 성이 동북 9성이다. 성을 쌓은 이후에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朝貢)을 바치기로 약속하며 동북 9성 돌려줄 것을 요청하여 고려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후 세력이 막강해진 여진은 1115년 금나라(金)를 건국했고 고려에 사대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당시 고려의 집권 세력이었던 이자겸(李資謙) 등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동북 9성 위치는 함경도 지역으로 14세기에 공민왕(恭愍王)이 원나라(元)로부터 차지한 철령 이북의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던 곳으로 명나라(明)가 일방적으로 철령위(鐵岺衛)를 설치하고 고려에 알린 곳과 같은 지역이다. 결과적으로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영토를 다른 나라에 빼앗겼다.

고려시대 최영(崔瑩) 장군 요동 정벌 사건, 조선시대 정도전(鄭道傳) 요동 정벌(遼東征伐) 사건 - 서기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원나라로부터 중국의 산동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성(張士誠)과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고려는 대호군(大護軍) 대장군으로 병력 2000명과 함께 출정하게 되었다. 서기 1355년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함경도 지역의 쌍성총관부가 점령한 땅을 되찾았고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넘어 요양 지역에 이르는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나서게 되었다. 요동 정벌을 주장하면서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이성계 등의 무리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하여 실패하였다. 정도전도 조선 건국 이후에 명나라와의 사대주의 외교 관계를 끊고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諸候國)으로 신하(臣下)의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명나라 영토 지역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서기 1398년(조선 태조 7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고 요동 정벌 계획도 중단되었다.
 
조선시대 김종서(金宗瑞)의 4군 6진 설치 사건 -  조선 초기에 한반도 북쪽에 살고 있던 여진족 부족들이 자주 국경을 넘어서 피해를 주었다. 여진족은 국경 넘어서 민가에 침입하여 재산을 빼앗거나 불을 지르는 등 조선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자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은 최윤덕(崔潤德)과 이천(李薦)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여진족을 몰아내도록 했다. 그런 다음에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설치했다. 최윤덕과 이천 등은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진지를 만들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로 임명해서 동북쪽에 있덩 여진족을 몰아내게 했다. 그런 다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했다. 6진은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이며 4군과 함께 조선의 북쪽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 세종은 4군 6진을 설치하고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은 거란이나 여진 등 북방 민족이 들어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영토라고 볼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북방 이민족들이 자주 피해를 주었기에 세종은 옛 영토를 되찾으려고 적극적으로 정벌에 나섰다. 4군 6진의 개척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결정 짓는 계기가 되었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한국사 사전1-유물과 유적 법과 제도,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시사상식사전,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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