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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임진왜란 해전海戰

중세시대 고려-조선시대

by 느낌 . 2023. 3. 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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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 지도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1576년(조선시대 선조 9년)에 무과 과거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으로 일했다. 그 다음에 함경도에서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직책으로 일했고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직책을 거쳐서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으로 일했다.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 선전관 등이 되었고 1589년에는 정읍 현감으로 있었는데 당시에 류성룡(柳成龍)이 추천하여 이순신은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 직책으로 승진하였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고 1592년 4월 13일에 일본이 전쟁(임진왜란, 壬辰倭亂)을 일으켜서 조선 영토를 침략했다. 1598년 11월 19일에 노량 해전에서 퇴각하는 왜군이 발사한 조총의 총알에 맞고 죽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조선 선조 30년) 9월 16일에 이순신이 명량(울돌목,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 지역에서 일본 수군(水軍)에게 승리한 해전(海戰)이다. 1592년에 일본이 전쟁을 중단하는 협상을 벌이던 도중에 조선을 공격했다. 당시 이순신은 조선 수군(水軍)의 지휘관 자리에서 쫓겨나서 일반 군졸 신분이었다. 경상도 부산(釜山)에 있는 일본군의 본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벼슬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순신에 이어서 원균(元均)이 새로운 수군 지휘관이 되었는데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 수군에게 큰 패배를 당하면서 조선 수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수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이 명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였다. 이순신은 남아 있던 배 13척을 가지고 싸울 준비를 했는데 당시 일본은 전함 133척이었고 군사 수가 3만명에 가까웠다. 1597년 9월 16일에 일본 수군이 명량 바다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조선의 전함을 일렬로 배치하여 좁은 물길을 지나가려는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일본 수군은 좁고 거친 물살에 갇힌 채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서 전함 31척을 잃고 8000명에 가까운 수의 군사가 죽고 부상을 입었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다. 1598년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안전한 철수를 보장해 달라며 명나라 장군 진린(陣璘)에게 뇌물을 보냈다. 이순신과 진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현재의 남해군)에서 본국으로 도망가는 왜선 5백여척을 공격하여 왜선 450척 가까이 침몰시켰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포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조선 선조 25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좌수영의 이순신(李舜臣) 함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 연합수군은 사천포 해전에서 왜군 함선 13척을 물리쳤고 왜군 2600명 가까이 죽였다. 그리고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전선 3척이 삼천포(三千浦) 앞바다를 거쳐서 사량도(蛇梁島)에 머물다가 거북선을 앞세워서 현자총통,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화포(火砲) 무기를 발사하고 군선을 부딫히며 왜선을 부숴버렸다. 왜군 장수는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서 쓰러졌고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왜선으로 들어가서 왜군 장수를 죽였다. 왜군 장수 가메이 고레노리(亀井玆矩)가 죽었고 왜군은 도망쳤다. 왜군은 군선 21척을 잃었고 많은 수의 왜군이 죽었다.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포해전에 이어 치른 두번째 해전이다.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7월에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연합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주력 부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순신은 1592년 7월 5일에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군선을 남해 지역 조선 수군 본영(전라도 여수)의 앞바다에 집결시키고 합동 군사 훈련을 했다. 1592년 7월 6일에 조선 수군 본영을 출발해서 노량(露梁,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군함 7척과 합류하여 군선이 55척이 모였다. 판옥선 5, 6척이 일본 수군을 공격하였고 한산섬으로 끌어들였다.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 형태의 모양새로 군선을 움직여서 자리잡고 궁지에 몰린 왜선을 향해서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다. 중위장 권준(權俊)이 왜선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잡았고 왜선 47척을 부숴버리고 왜선 12척을 잡았다.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는 전쟁 상황이 악화되자 남은 전선 14척을 이끌고 경상도 김해 지역으로 퇴각하였다.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조선 선조 25년) 5월에 옥포(玉浦, 경상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조선 조정의 출전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본영(本營, 전라도 여수)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모으고 장병과 전선을 점검한 뒤 전대(戰隊)를 편성하였다. 전선(戰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모두 85척이었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던 30척 가까운 수의 왜선은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흩어져 있었고 왜군들은 해안 지역 포구로 들어가서 민가(民家)의 재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았다. 배를 타고 도망치던 왜군을 조선 수군이 쫒아가서 공격하여 왜선 26척을 부숴버렸다. 조선군은 왜군을 추격하여 영등포(永登浦, 경상도 거제시 장목면)를 거쳐서 합포(合浦, 경상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왜선 5척을 물리쳤고 다음 날에는 적진포(赤珍浦, 경상도 통영시 광도면)에서 11척을 물리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은 1592년(조선 선조 25년) 9월 1일에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과 싸운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100척에 가까운 수의 왜선을 물리쳤다. 낙동강 하구를 거쳐서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 다대포(多大浦), 서평포(西平浦), 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왜선 24척을 부숴버렸고 부산포 앞바다로 진출했다.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척에 가까운 수의 조선 수군이 장사진 지역을 공격하여 우부장(右部將)인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구선돌격장(龜船突擊將) 이언량(李彦良), 전부장(前部將) 이순신(李純信),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 등의 부하 장수들을 앞장 세워서 조선 수군을 이끌고 100척에 가까운 수의 왜선을 부숴버렸다.
 
*본인 작성, NAVER 지식백과 한국사 사전2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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